소련 모델에 대한 전(前) 식민지 나라들의 동경

소련이 당분간 – 확실히, 짧지는 않을 시기 동안 –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승리한 유일한 나라가 될 것이라는 사실이 명백해지자 볼셰비키에게 논리적인, 사실상 유일하게 설득력 있는 정책은 소련의 경제와 사회를 가능한 빨리 후진적인 것에서 선진적인 것으로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는 알려진 가장 분명한 방식은, ‘우매하고’ 무지하고 문맹이고 미신적이기로 악명 높은 대중의 문화적 후진성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을, 기술의 근대화 및 산업혁명의 전면적 추진과 결합시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소련 모델에 기반한 공산주의는 우선적으로, 후진국을 선진국으로 변화시키는 프로그램이 되었다.

초고속의 경제성장에 대한 이러한 몰두는 파국의 시대를 맞은 선진 자본주의 세계 – 자신의 경제적 활력을 되찾을 길을 필사적으로 모색한 – 에서조차 호소력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한 몰두는 서유럽 및 북미 밖의 세계의 문제들에 대해서는 훨씬 더 직접 들어맞았다. 그 세계의 대부분은 소련의 농업사회적 후진성에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경제발전에 대한 소련식 처방 – 현대 산업사회에 필수적인 기간산업과 사회간접자본 시설을 초고속으로 건설할 것을 목표로 한, 국가의 중앙화된 경제계획 – 은 자신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 같았다.

모스크바는 반(反)제국주의를 대표했기 때문에 디트로이트나 맨체스터보다 더 매력적인 모델이었을 뿐만 아니라, 특히 사적자본도, 대규모의 사적, 이윤지향적 산업도 부족한 나라들에게 더욱 적합한 모델로 보였다. 이러한 의미의 ‘사회주의’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에, 새로 독립한 수많은 전(前) 식민지 나라들 – 그 정부들이 공산주의 정치체제를 거부했던 – 을 고무했다.

[에릭 홉스봄, 극단의 시대:20세기 역사, 이용우 옮김, 까치글방, pp 518~519]

‘계획’이라는 단어의 유행

대공황의 충격은, 요란스럽게 자본주의와 관계를 끊었던 유일한 나라인 소련이 대공황으로부터 안전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에 더더욱 컸다. 나머지 세계 또는 그중에서 적어도 자유주의적 서방 자본주의가 침체를 겪었던 반면, 소련은 새로운 5개년계획하에 초고속으로 대대적인 공업화에 몰두했다. [중략]

바로 이러한 성과들이 모든 이데올로기 성향의 외국인 관찰자들 – 1930~35년에 모스크바에 몰려온, 적은 수이지만 영향력 있는 사회경제적 관광객들을 비롯한 – 에게, 소련 경제의 두드러진 원시성과 비효율성이라든가 스탈린의 집단화와 대대적인 억압이 보여준 무자비함과 야만성보다 더 깊은 인상을 주었다. [중략]

러시아의 5개년계획을 본따 ‘계획’이라는 말이 정계에서 통용어가 되었다.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벨기에와 노르웨이에서처럼 ‘계획’을 채택했다. 매우 저명하고 상당한 지위에 있는 영국의 문관이자 기성 권력층의 중심인물이었던 아서 솔터 경은 나라와 세계가 대공황의 악순환에서 벗어나려면 사회적 계획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회복(Recovery)’이라는 책을 썼다.

영국의 다른 중도파 문관들과 공무원들은 PEP(Political and Economic Planning, 정치-경제 계획)라고 불리는 초당파적 두뇌집단을 창설했고, 뒤에 수상이 될 해럴드 맥밀런(1894~1986)같은 젊은 보수당 정치가들은 ‘계획’의 대변인이 되었다. 1933년에 히틀러가 ‘5개년계획’을 도입했듯이 나치조차 그러한 사고를 도용했던 것이다.

[에릭 홉스봄, 극단의 시대:20세기 역사, 이용우 옮김, 까치글방, pp 138~1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