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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결정의 신탁(信託)에 관해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시장에서는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혼합 경제에서는 위험 가능성에 대한 결정을 내리는 힘이 널리 확산되고 분산되어 있는 반면, 사회주의 제도 안에서는 중앙 집권화 되었다는 것이다. 두 경우 모두, 위험이 비용으로 ‘전환’된다. 사회주의 제도 안에서 비용은 관리 가격으로 국민들에게 부과된다. 자본주의 제도 안에서 비용은 보험이 생산과 분배 과정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모든 물건과 서비스를 이용하는 소비자들에게로 떨어진다. [국가의 퇴각, 수잔 스트레인지 지음, 양오석 옮김, 푸른길, 2001년, p203]

이렇듯 시장경제의 기본원칙은 위험을 감수하는 이, 재화나 용역을 이용하는 이가 비용을 부담한다는 것이다. 또는 그렇게들 생각하고 있다. 하다못해 일회용 라이터를 사더라도 그 가격에는 판매회사가 화재보험에 가입한 비용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 면에서 사람들이 이번 구제금융에 – 새로운 이름은 “예외적인 지원(exceptional assistance)”이라고 – 특히 분노하는 것이 있다면, 반(反)시장적인 저항이나 반(反)자본주의적인 저항도 있겠지만 상당 부분 구제금융을 받은 기관들이 ‘보편적이지만 반드시 정확하지만은 않은’ 시장의 규칙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즉 여태의 수익은 천문학적인 보수로, 또 나아가 구제금융 받은 돈까지 이른바 잔류보수(retention bonus)라는 명목으로 가져가는 반면 위험감수에 대한 비용은 수잔 스트레인지가 사회주의 제도에 대해 묘사한 것처럼 국가가 – 결국은 국민이 – 부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런 모순된 상황을 월스트리트의 탐욕이나 부패한 정치가의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현대사회에서 거대집단으로 – 때로는 개별국가보다도 큰 단위로 – 성장한 금융 및 제조업 등의 산업부문은 이미 몇 번 강조하였다시피 단순히 자본가의 사리사욕을 채워주는 이상의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개별 국가, 나아가 문명이 존속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존재를 유지시킬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부문들이 소유권 상으로 사유화되어 있는 한편, 더 나아가 이익창출 – 동시에 수반되는 위험감수 – 의사 결정이 여러 보완책에도 불구하고 – 예를 들면 이사회나 주주총회 – 여전히 극소수 소위 경영진의 수중에 놓여 있다는 점이 현 경제체제의 문제 중 하나라 할 것이다.

그래서 예컨대 의사결정단위를 좀더 확대하여 노동자평의회 혹은 그 이상의 공동체 단위에서 위험을 감수하기로 의사결정을 하였다면 적어도 그에 수반되는 비용이 사회적으로 처리된다는 것에 대해서는 좀더 관대해질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여전히 이러한 의사결정 과정은 선입견에 의해서건 또는 경영학적인 명민한 연구에 의해서건 여전히 집단주의적 사고에 의해서보다는, 번뜩이는 상상력의 소유자 또는 전문가의 ‘고뇌에 찬 결단’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더 낫다는 인식이 일반적이다.

결국 소유권이 사유화 또는 집중화의 모순을 극복하고 좀더 광범위하게 확산된다 할지라도 – 이는 사실 꽤 진척이 되어 있는데 공모펀드랄지 연기금 등이 투자를 할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 여전히 그 재산권자들이 의사결정을 소수의 경영진 또는 전문가에게 신탁(信託)할 경우 소위 공정성 시비가 재연될 개연성이 클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의 제도 하에서는 결국 유효한 수단들이 법제화 등의 각종 규제, 언론 등을 통한 사회적 감시, 그릇된 또는 부도덕한 결정에 대한 징벌 정도 일 것이다. 그나마 그 징벌도 권력자들에게는 예외가 적용되지만 말이다.

‘이익의 사유화, 비용의 사회화’에 대한 단상

요즘 미국의 자본주의를 두고 ‘이익은 사유화되고 비용은 사회화되는 부자들의 사회주의’라는 표현이 아주 유행하고 있다. 특히 자신들의 돈으로 부도덕하고 무능력한 기업주들의 목숨을 연장시켜주었다고 생각하는 많은 미국 납세자들이 이러한 주장에 심히 공감할 것으로 생각된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사실 이러한 ‘부자들의 사회주의’는 자본주의 역사에 있어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어떠한 사회인가. 생산수단을 집적하고 대규모화시켜서 소비할 것을 만들어내는 사회다. 그곳에서 만들어내는 것들은 만들어낸 이가 쓰기위해서가 아니다. 다른 이들에게 팔려고 만든 것들이다. 즉 상품(商品)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상품경제/시장경제의 시스템이 본격화된 사회다. 즉 소비는 자본주의와 더불어 ‘사회화’되었다.

한편 (생산수단의) 소유와 투자는 여전히 ‘개인화’되어 있었다. 주식회사라는 신종 기업형태가 일반화되기 전까지 사기업들은 개인 또는 가족의 소유였다. 주식의 공개가 ‘사회주의’를 재촉할 것이라는 피터 드러거와 같은 이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주식, 즉 회사의 소유권은 소수 자본의 손에 집중되어 왔다. 그런 의미에서 소비와 투자 ‘개인화’는 자본주의의 본질 중 하나이다.

사기업은 사회화된 소비를 담당하는 주요주체다. 특히 오늘 날과 같이 국가의 공공서비스가 민간부문으로 이전되는 시점에서는 더욱 그 비중이 커져가고 있다 할 수도 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국가가 망해가는 기업을 구제하는 가장 큰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회화된 소비를 담당하는 기업의 사회적 역할을 방기하면(주1) 그것은 체제의 – 자본주의에 국한된 것이 아닌 물질문명의 – 붕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소비와 소유/투자의 불일치가 납세자들을 분노하게 한다. 기업의 상품을 국민이 소비하는 한편으로 그 기업을 국민이 소유하고 있다면 – 물론 그 집단이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겠지만 – 불만은 한층 줄어들 것이다. 반면 국민이 소비하는 상품을 생산하는 기업의 소유주, 그리고 의사결정의 주체가 회장 일가, 론스타, 듣보잡 소버린 펀드, 또는 헤지펀드일 경우, 그리고 그들이 구제 금융으로 한숨을 돌릴 경우 왕짜증이 나는 것이다.

그러나 일개국가는 여전히 소유와 투자의 개인화는 손댈 의지가 없다. 보다 노골적으로 표현하자면 능력이 없다. 조지 부시, 헨리 폴슨, 고든 브라운, 니콜라 사르코지, 이명박 등등 국가의 수반 중 위와 같은 기업의 모순에 대해 1초 이상 고민한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이번에 미행정부가 정리신탁공사(RTC·Resolution Trust Corp.)를 신설하지만 이를 기업형태의 본질을 손대기 위한 조치라고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사실 세상은 더욱 복잡해져가고 있다. 예전처럼 단순히 노동자와 자본의 갈등,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갈등으로만 관찰할 수 없는 현상이 늘어가고 있다. 미행정부가 자국의 모기지 사용자 뿐 아니라 다른 나라의 소버린 펀드의 이해관계를 위해 프래니를 구제해준 것에 대해 누가 약자고 누가 착취자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인가. 다 딴에는 국가를 위하고 서민을 위한 일들을 하고 있다.

‘이익의 사유화되고 비용은 사회화’되었다고 볼멘소리 하는 납세자들 중에서도 자신이 투자한 간접투자펀드가 그 ‘이익은 사유화’되는 과정에서 구제받은 아이러니한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결국 모순의 본질을 살펴보는 것, 그리고 그 해법을 찾는 과정은 ‘악랄한 자본가를 몰아내자’라는 좌익적 도덕론만으로는 부족한 측면이 있을 것이다.

(주1) 즉 시장근본주의자들이 그토록 신봉하는 자유방임도 때와 장소를 가려가면서 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내 생각엔 시장근본주의자들이 가장 위험한 반(反)자본주의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