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빼로데이 斷想

오늘은 유명한 빼빼로 데이다. 그것도 2011년 11월 11일이라고 ‘밀레니엄 빼빼로 데이’라 이름 붙여진 날이라 한다. -_-; 하지만 일부 뜻있는 사람들은 특정일이 상업적 술수에 말려드는 것을 걱정하며 이 날이 사실은 ‘농어업인의 날’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기도 하고, 대안으로 ‘가래떡의 날’이라 하자는 가하면, 심지어 젓가락을 똑바로 쓰도록 장려하는 ‘젓가락의 날’로 키우자고 주장하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이미 알고들 있다시피 이런 노력은 그다지 결실을 맺지 못하고, 어느덧 11월 11일은 복날이 삼계탕 집에 그러하듯 롯데의 ‘대박 데이’로 자리잡고 말았다.

pepero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새우깡이 그러하듯 빼빼로도 사실은 일본의 다른 과자를 베낀 과자다. 일본에서 팔리고 있는 과자의 브랜드는 포키(pocky)다. 하지만 11월 11일을 선점한 것은 빼빼로인 것으로 추측된다. 이런 기막힌 상술을 놓친 포키 측도 최근 ‘포키 데이’로 지정하여 공격적인 마케팅에 나섰다고 한다. 그저 그런 기념일이었던 발렌타인데이가 일본 기업의 상술로 초콜릿 매출에 기여하고, 화이트데이가 사탕 매출에 기여하고… 빼빼로 데이가 다시 일본의 역수입되고… ‘OO데이’는 어쩌면 자본주의의 탈출구일지도 모르겠다. 크리스마스가 그러한 것처럼.


YMO를 활용한 포키 광고

p.s. 11월 11일을 ‘젓가락의 날’이라고 지정하고 싶으면 11월 9일을 ‘젓가락과 숟가락의 날’로 정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베네수엘라에서 개최된 게이 퍼레이드

지난 7월 12일 베네수엘라의 카르카스 거리에서 게이퍼레이드가 개최되었다. 이 행사주체들은 베네수엘라에서 동성애자들과 양성애자들이 이성애자들의 부부들이 누리는 법적권리를 똑같이 누릴 수 있는 평등을 요구했다. ‘베네수엘라 통합 사회주의당(United Socialist Party of Venezuela)’의 대변인 Juan Carlos Aléman Perez는 연설을 통해 국회에서 이 요구를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시위 참가자들은 사회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베네수엘라 국회에서조차 아직까지 동성애 혐오가 존재하는 등 갈 길이 멀다고 강조했다.

사진 Aporrea

출처 venezuelanalysis.com

“할인판매” 빵집

런던에는 두 가지 종류의 빵집이 있다. 빵을 그 가치대로 판매하는 “정가판매” 빵집과, 그 가치보다 싸게 파는 “할인판매” 빵집이 그것이다. 후자의 부류에 속하는 것이 빵집 총수의 3/4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빵제조업자의 고충”에 관한 정부위원 트리멘히어(H. S. Tremenhere)의 [報告書], 런던, 1862년). 이 할인판매 빵집들은 거의 예외없이 명반이나 비누나 粗製탄산가리나 석회나, 더비셔州에서 나는 石粉이나 기타 유사한 成分을 섞어 놓음으로써 不純빵을 판매하고 있다(앞에서 인용한보고서 및 “不純빵의 製造에 관한 1855년의 委員會”의 報告 및 하설[Hassall]의 [적발된 불순품], 제2판, 런던1861년을 보라). 존 고든(John Gordon)은 1855년의 위원회에서 다음과 같이 언명하였다. “이와 같은 불순빵 때문에 매일 매일 2파운드의 빵으로 살아가는 빈민들은 이제 자기의 건강을 해치는 것은 물론이고 실제로는 영양분의 1/4도섭취하지 못하고 있다.” [중략] 트리멘히어는 (앞의 보고서에서) 그들은 [중략] 勞動週間이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임금을 받기 때문에, 그들은 “한 주일 동안 그들의 가족이 소비한 빵값을 주말에 가서야 비로소 지불할 수 있다.”[칼 마르크스 지음, 김수행 옮김, 자본론I[上], 비봉출판사, 1994년, p220]

이 글은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노동력은 매매계약에서 확정된 기간만큼 기능을 수행한 뒤에야 비로소 지불을 받는”다는, 일종의 ‘노동력 선대(先貸), 혹은 임금 후불(後拂)’ 제도를 설명하기 위한 보충설명이다. 노동자는 자신이 판매한 노동력의 대가를 일정기간이 지난 후에 받기 때문에 위와 같은 곤란을 겪는 한편, 자본가가 파산하는 경우 임금을 받지 못하게 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한편 이 글을 읽고 본래 의도와 달리 드는 잡념은 이러한 것이다. 즉, 런던에 “정가판매” 빵집이 전체빵집 수의 1/4이고 “할인판매” 빵집이 3/4이면 정상(正常)적인 빵집은 전자일까 후자일까 하는 의문이 그것이다. 우리가 통상 평균이라 부르는 것이나 보통이라 부르는 것들은 대부분 특정 집단의 다수를 차지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한 기준에서 보자면 정상적인 빵집은 “할인판매” 빵집이 아닐까?

문제는 이들 빵집이 빵값을 할인하기 위해 취한 조치다. 이들은 사람이 먹어서는 안 될 것들을 집어넣어 단가를 낮춤으로써 노동자의 수요를 충족시켰던 것이다. 노동자들의 노동력 재생산을 위해서는 정상적(!)인 영양성분이 가미된 음식을 먹어야 함에도 정상적인 빵집에서는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빵을 제조하여 “실제로는 영양분의 1/4도섭취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정상적인 빵집은 정상적인 영양분을 제공하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사회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저렇게 장기적으로 비정상적인 영양섭취에 견디지 못하는 노동자가 노동현장에서 탈락할 경우 다른 새로운 노동력이 이 빈틈을 채워주는 일종의 노동예비군이 존재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으로 그가 노동현장에서 탈락하기 전까지는 마른 걸레를 쥐어짜듯 자신의 근력을 한계상황까지 몰아붙였을 것이다. 우리의 노동시장 역시 개발시기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많은 노동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상황이다.

실로 노동자들의 노동력 재생산의 수단이 되는 생활수단, 그 중에서도 특히 음식과 관련한 소요비용은 노동자뿐만 아니라 자본가들에게도 중요한 관심사항이다. 노동대중의 노동력 재생산을 위해 너무 많은 식비가 소모된다면 곧바로 임금상승 압박에 시달릴 것이고 이는 총자본에게 바람직하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값싸게 먹을 수 있는 식품의 개발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였다.

그 대표적인 음식이 햄버거, 라면 같은 패스트푸드다. 원래는 긴 조리시간과 많은 제조비용이 소요되었을 햄버거와 같은 음식들은 표준화, 합성식품 첨가, 대량생산 등의 처방이 가미되면서 단가를 낮출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이전보다 더 싼 비용으로 노동력 재생산에 필요한 영양분을 제공하면서 노동자들은 싼 임금에도 큰 불만 없이 노동현장에서 머물러 있게 되었다. 문제는 다시 돌아가서 그것이 장기적으로 정상적인 영양분을 제공하느냐 하는 점이다.

지금 세상에서 돌가루(石粉)가 들어간 빵을 판매하면 난리가 날 것이다. 당장 소비자 불매운동이 일어나고 사법당국이 처벌하고 등등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이제는 그런 무지몽매한 짓을 용서하지 않는 현명한 소비자들로 넘쳐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같은 이치로 패스트푸드, GMO식품, 광우병 의심 소고기에 대해 현명한 소비를 하는 이의 숫자는 돌가루 빵에 비해 현격히 줄어들 것이다. 알아도 값이 싸니 사먹을 수밖에 없다. 가만. 19세기 노동자와 다를 게 없다.

오히려 상황은 더 악화되었을 수도 있다. 1862년 런던에서는 – 사실은 그곳이 정상적인 빵집인 – 1/4의 정가판매 빵집이 있었다. 하지만 과연 21세기의 서울에는 몇 분의 1의 정상적인 식당이 있을까? 항생제 먹이지 않은 닭으로 요리된 삼계탕, 합성식품이 아닌 반찬, GMO가 아닌 야채로 만든 반찬, 중국산이 아닌 직접 담근 김치를 파는 식당이 몇 개나 될까? 돌가루는 아니니 그냥 넘어가자고 할 수는 있겠지만 모두가 “할인”식당으로 뒤덮여진 후 그때는 돌가루를 먹지 않을 선택권마저 없는 세상이 될지도 모른다.

권하는 글 – 인간이 만든 위대한 속임수, 식품첨가물

퍼블릭 옵션 지못미

미국의 Health Care Bill에 관한 최근 글에 미쿡에 계신 ‘힘찬’님께서 안타까운 사연을 올려주셨는데 내용이 하도 절절해서 다른 독자 분들과 공유하기 위해 별도의 글로 퍼 올립니다. 원래 글은 여기에 ……. 인민들이 자기가 원하는 것을 앎과 자기가 그것을 쟁취하는 방법을 앎에 있어서 괴리가 발생할 때 어떤 불행이 빚어지는 가를 생생히 보여주는 사례.

퍼블릭 옵션 지못미! ㅠㅠ

이대로 개혁안이 입법화 된다 해도 허울만 ‘개혁’일 뿐, 여전히 비용 때문에 잘린 손가락들 중 어떤 손가락만 붙여야 할지 고민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질 것이 심히 우려됨.
그리고 미국에서는 그런 비극적 상황이 빈곤층뿐 아니라, 평범한 중산층에서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는 사실이 더욱 놀라울 뿐이랍니다.

이 동네서 서로 식사 초대도 하고 영화도 보러 댕길 만큼 꽤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있었는데, 최근에 오랫동안 연락이 없길래 힘들게 소식을 전해봤더니, 글쎄 마약 중독으로 수용소에 끌려가 계신 거라.
이유인 즉슨, 지난 여름 건강보험을 갱신해야 하는 타이밍에 사고로 발목을 다쳤는데, 부상을 당한 상태에서는 건강보험 갱신이 안 되는 거라. (이게 무슨 보험이얏!!) 가볍게 발목이 부러진 것도 보험 없이는 수 만불의 치료비를 지불해야 하기 때문에, 가족들 멀쩡하게 돈 벌고, 빛나는 석사 학위 2개를 자랑하는 나름 엘리트 중산층의 이 아줌마가 병원 치료를 포기하고, 무허가 피지션에게 진통제를 받아 먹으면서 몇 달을 버티다가 그만 약물 중독에 걸려 버린 거라. 극심한 감정기복과 불면증, 신체 경련 등의 마약 중독 증세를 호소하다 결국 주변 사람들에 의해서 수용소에 끌려가 지금은 재활 치료를 받고 계신 거라.
생업도 포기한 채 가족과 생이별하고 두 달째 감금돼 있는 이 평범한 가정주부와 연말을 핑계로 어렵사리 통화를 하게 됐는데 글쎄,”이런 저렴한 마약 중독 재활 시설이 있는 나라에 사는 것이 무척 자랑스러워! 다 하나님이 아메리카를 블레스하셔서 그런 거지.” 이러는 거라. 이제는 건강보험 개혁안에 찬성하냐고 조심스럽게 던진 나의 질문에 그분이 하신 동문서답임.
가드 블레스 아메리카래. 어쩔.. ㅠㅠ

신의 말씀

이리하여 <서기>야말로 다시금, 모든 것 위에 군림하고, 모든 것을 수중에 장악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럴진대, 학생들에게 배움에 대한 의욕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직업에마다 각기 따르는 부정적인 측면들을 유창하게 열거하면서, 다른 어떤 직업보다도 우월한 서기생활의 이점을 제시하고 있는 이른바 [훈계] – 케티의 훈계 – 가 바로 이 시기에 작성되었다는 사실은 하등 놀랄 바가 없다. 그 발췌문을 인용해 보자.
“그는 그 아이를 높은 양반들의 자제들 틈, 도시 안에서 가장 높이 솟아 서 있는 한 사람으로 만들고자 하였으매, 아이를 서기학교에 넣기 위해 도회지를 향하여 남쪽으로 데려왔다. 그리고는 이곳에 와서 아이에게 이와 같이 말하였다 : ‘나는 매맞는 사람들을 눈여겨 보아 왔다만, 그것을 보더라도 너는 문필에 마음을 써야 할 것이니라. 나는 또한 강제노동으로부터 벗어난 사람들도 보아 왔단다. 그러한즉 서책(書冊)보다 위에 서는 것은 아무것도 없느니라. [중략] 잘 보거라, 관리(官吏)를 빼놓고는 명령을 받으며 일하지 않아도 되는 직업이 없단다. 관리란 바로, 그 자신이 명령을 내리는 사람이란다. 글을 쓸 줄 알게 되면, 이는 내가 지금까지 네 앞에서 길게 늘어놓은 온갖 직업보다도 너에게 더 쓸모가 있게 될 것이나라.” [勞動의 歷史, 헬무트 쉬나이더 外, 韓貞淑 譯, 한길사, 1982년, pp 93~95]

고대 이집트의 지혜의 책 중 하나인 케티의 훈계에서의 글을 재인용한 것이다. 이집트인들에게 문자는 비비원숭이 머리 모양의 지식의 신인 토트의 선물이었고, 이러한 이유로 그들은 자신들의 문자를 ‘신의 말씀’이라는 의미의 ‘메두네제’라 불렀다 한다.(주1) 그런데 상기 묘사를 볼 것 같으면 문자를 아는 것은 단순히 ‘신의 말씀’을 전하는 데에 그친 것이 아님이 분명해 보인다.

문자의 발전은 위에 예시된 서기(書記)와 같은 전문가 계층의 형성을 통해 소위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분리를 초래하였다. 자연스레 문자를 아는 이의 차지인 정신노동은 ‘명령을 내리는 사람’으로서 육체노동을 지배 내지는 관리하게 되었다. 그들은 왕의 명을 받들어 수행하는 십장(什長)이자 판관(判官)이자 세리(稅吏)이자 문필가였다. 그러한 권위는 왕정의 붕괴 후 자연스레 새로운 지배계급으로의 길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그 뒤로도 오랫동안 이집트뿐 아니라 거의 모든 사회에서 문자는 소수의 특권이었다. 앞서 보았듯이 그것은 ‘신의 말씀’이라는 진리에로의 접근권한이자, 보다 직설적으로는 권력과 이에 따른 부의 축적의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자유롭고 평등한, 그럼으로써 더 부유해진 현대 사회의 전제조건은 문자교육 – 그리고 교육 그 자체 – 에 대한 무차별적인 접근이라 할 것이다.

물론 이제는 글을 읽을 줄 안다는 것 자체는 너무나 기초적인 토대일 뿐이다. 이제 개개인은 좀 더 세분화되고 다양화되고 전문화된 교육을 받아야만 다른 이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요즘 보면 대한민국 사회에서 교육의 평등화를 통해 달성된 자유, 평등, 부가 이제 새로이 차별화될 교육의 선별을 통해 붕괴될 조짐을 보인다. 외고, 자사고, 특수고, 명문대 등 차별화는 이미 상당부분 진행중이며 부촌의 자제들이 고급교육 수혜자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교육 게토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지금도 수많은 ‘케티’는 고대의 케티만큼 솔직한 어투로 자신의 아이들에게 교육의 효과를 역설할 것이다. 육체노동자들의 고된 하루와 비루한 삶을 반면교사로 삼을 것을 주문하면서 말이다. 어떤 권력자는 ‘면접만으로 학교에 진학하는’ 사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가 그러한 사회를 만들 것이라 믿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고, 더군다나 그렇게 해줄 것을 기대하는 이도 생각만큼 많지 않을 것이라 생각되는 상황이 요즘의 대한민국 교육의 현실이다.

(주1) 이는 비단 이집트뿐만이 아닌 거의 모든 고대사회의 특징이었을 것이다. 글을 안다는 것은 구술사회의 유적을 전하는 엄청난 도구이고 그 유적 중 가장 소중히 남겨야 할 것은 그 사회의 신화일터이니 글을 아는 이는 자연히 권력자이거나 성직자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공공의 정신(public-spiritedness)”

Vaughan ignored the remark. “I don’t want you to close the beaches,” he said.
“So I see.”
“You know why. The Fourth of July isn’t far off. and that’s the make-or-break weekend. We’d be cutting our own throats.”
“I know the argument, and I’m sure you know my reasons for wanting to close the beaches. It’s not as if I have anything to gain.”
[중략]
Brody sighed. “Shit,” he said. “I don’t like it. it doesn’t smell good. But okay, if it’s that important.”
“It’s that important.” For the first time since he had arrived, Vaughan smiled. “Thanks, Martin,” he said, and he stood up. “Now I have the rather unpleasant task of visiting the Footes.”
“How are you going to keep them from shooting off their mouth to the Times of the News?”
“I hope to be able to appeal to their public-spiritedness,” Vaughan siad, “just as I appealed to yours”
[Jaws, Peter Benchley, 三志社, 1984년, pp 86~92]

Steven Spielberg의 걸작 영화로 잘 알려진 Jaws의 원작 소설 중 일부분이다. 뜨내기 여인이 해변에서 상어의 습격으로 추정되는 공격을 당해 온 몸이 찢긴 채 해변에서 발견된 다음 날, 이에 해변을 폐쇄하려는 경찰서장 Martin Brody와 이를 말리는 읍장 Larry Vaughan의 설전을 묘사한 장면이다.

읍장의 논리는 여름 한철 장사로 그 해를 탈 없이 지내는 조그만 휴양지촌인 Amity가 뜨내기 여자의 죽음 때문에 망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경찰서장 Brody는 공공의 안녕을 위해 2~3일 간 해안을 폐쇄하겠다고 고집을 부렸으나 자치조례에 따라 자신을 해임할 수도 있다는 읍장의 협박에 굴복하여 자신의 주장을 철회한다.

그런데 묘하게도 읍장이 서장의 입을 막으려는 또 다른 논리 역시 서장의 논리와 유사하다. 즉, 그것은 바로 “공공의 정신(public-spiritedness)”이다. 서장의 논리가 불특정 다수인 공공의 안전을 보장하려는 목적이라면, 읍장의 논리가 공공, 즉 Amity 읍민들의 경제적 이해를 해치지 않겠다는 – 더불어 스스로 부동산 개발업자인 자신의 경제적 이해도 – 의지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물론 서장에게 가장 큰 위협은 읍장의 해임 협박이었지만 그 역시도 읍민들이 공유하고 있는 정서, 즉 ‘다수의 이익을 위한 소수의 희생’이라는 정서에 공감한 바도 크다. 소설에서는 그 해 여름 장사를 망칠 경우 Amity읍민의 1/3이 생활보호 수당을 받아야 할 정도의 가난한 읍으로 그리고 있다. 투표에 의한 선출직인 서장 역시 이러한 압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이다.

현실 세계에서 동일한 문제에 봉착할 경우 우리는 어떠한 선택을 하여야 할까? 경제적 피해는 다수에게 미치지만 상어의 습격은 극소수, 그 또한 지극히 희박한 확률 상의 문제이기 때문에 전자의 보호가 더 시급한 문제라고 판단하면 될까? 원작에서 Amity읍은 전자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이어지는 상어의 습격으로 말미암아 결국 후자의 결정으로 선회하였다. 우리 역시, 특히 ‘경제적 이익’과 결부된 의사결정에서는 ‘경제적 요소’가 일차적인 고려사항이 되는 경우가 많다.

FTA에서 그러했고, 환경문제와 경제적 이익이 상충할 때에 그러했고, 지난 선거철 뉴타운 이슈가 그러했고, 기업 및 공공기관의 구조조정 시에 경쟁력 강화라는 슬로건을 채택할 때에 그러했다. 하지만 때로 불특정 다수에 대한 적은 확률적 문제에 불과하기에 간과되었던 ‘상어의 습격’으로 인해 그간 얻었던 경제적 이익보다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할 때도 있었고, 지불할 개연성도 있는 상황이 많다.

이는 또한 소수자의 보호의 이슈일수도 있다. 즉, 다수자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과 소수자의 이익을 보호하여야 하는 것이 있을 때에 우리는 다수결의 원칙이 민주주의라는 논리를 들어 소수자의 이익(또는 권리)을 쉽게 포기하곤 한다. 하지만 다수의 이익을 관철하는 것이 대의민주제에 반드시 합치하는 것은 아니다. 해변의 안정이 보호되어야 하는 이유는 어느 누구든지 해변에 나가서 수영하는 한 상어의 습격은 무차별적이기 때문이니 말이다.

요컨대 “공공의 정신(public-spiritedness)”이라는 개념은 고정불변의 진리가 내포되어 있다기보다는 우리가 공화제를 채택한 이래로 시대와 장소에 따라 그 크기와 내포하는 의미가 변화되어 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과거 왕이나 귀족이 누리던 특혜를 공공(public)이 함께 누린다는 이상향의 큰 틀은 당연시되지만 세세한 항목은 때때로 정치적으로 악용되기도 했고 공공 스스로에 의해 수정되기도 했던 것이다. 이전의 공공성 개념이 그랬듯 21세기 형 공공성은 어떠해야 할지는 결국 현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손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