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만한 SF 몇 편

오랜만에 영화 추천 들어갑니다. :)

Rollerball(1975)

제임스 칸이 스포츠 스타 Jonathan E. 를 연기하고 노만 쥬이슨이 메가폰을 잡은 1975년 작으로 정치와 스포츠의 함수관계를 다룬 흔치 않은 소재의 작품이다. 이 영화에서 다루고 있는 미래의 지구는 국가도 없어지고 기업들도 기업전쟁(Corporate Wars)을 통해 하나로 통합되어 회사들은 고유명사가 아닌 그저 보통명사로 – 예로 ‘에너지 회사(Energy Corporation)’ 식으로 – 불리는 세상이다. 모든 것은 프로그래밍 되었고 더 이상 세상에 폭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기업의 임원들은 인간의 내재된 폭력성을 해소하기 위해 미래형 스포츠인 롤러볼을 창안하여 인기 스포츠로 키운다. 트랙을 돌면서 상대방에 대해 무자비한 폭력을 가하고 쇠로 만든 공을 골에 넣는 이 스포츠의 최고 스타는 ‘에너지 기업’ 이 이끄는 휴스턴 팀 소속의 Jonathan E. 다. 어느 날 기업간부 Bartholomew 는 기업의 결정이라며 Jonathan 이 선수생활을 그만둘 것을 명령한다. Jonathan 은 쉽게 수긍하지 못하면서 갈등은 시작된다. 물질적 풍요함도 자유의지에 대한 욕망을 꺾을 수 없다는 주제의식 측면에서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연상시키는 한편 스포츠 스타가 체제에 도전한다는 측면에서는 실존하였고 영화화되기도 했던 로마 시대의 검투사 스팔타쿠스를 연상시킨다.

The Invisible Man(1933)

프랑켄슈타인의 감독으로 유명한 James Whale 이 H.G. Wells 의 동명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작품이다. 투명인간이 되어서 세상을 지배하겠다는 야심을 품게 되는, 그런 한편으로 다시 정상인으로 돌아오고자 애쓰는 폭력적이고 광기어린 인간 잭그리핀의 해프닝을 통해 인간의 나약함과 모순됨을 그리고 있다. 극중에서는 잭그리핀의 난데 없는 폭력적 성향을 투명인간 실험의 주재료인 신비의 약품 모노케인의 영향으로 설명하고 있다. 후에 ‘커밍아웃한’ 동성애자 감독으로서 – 이미 Gods And Monsters 라는 James Whale 에 관한 전기 영화에서 알아버린지라 – 자신의 마이너리티를 투영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30년대 초반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특수효과는 대단히 인상적이다. 주인공 Claude Rains 가 영화 끝날 때야 한번 얼굴을 내비치는 희한한 케이스의 영화이기도 하다.

The Lost World(1925)

코넌 도일 경은 탐정소설 셜록 홈즈 시리즈를 통해 역사에서 지워질 수 없는 문학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SF 소설에도 남다른 애정을 지니고 있었다. 코넌 도일 경이 1911년 발표된 The Lost World 는 아마존 지방에 지각의 융기로 다른 세계와 격리된 세계가 있고 그 곳에 선사시대의 공룡이 산다는 줄거리의 소설이다. 이 작품이 1925년 무성영화로 제작되었다. 요즘 기준으로 보면 유치하다 치부될지 모르지만 그 당시로서는 획기적이었을 스톱모션 기법을 동원한 공룡의 묘사는 영화사에 큰 획을 긋는 기술의 발전이었고 이후 1933년 제작된 King Kong 에서도 같은 기법이 사용되었다. King Kong 을 비롯하여 쥬라기 공원 등 유사한 영화에 큰 영향을 미친 이 괴수 SF영화는 불행하게도 오리지널 필름이 거의 폐기될 정도로 손상되었으나 후에 62분짜리 필름으로 복원되었다고 한다.

La Jetee(1962)

영화라기보다는 한편의 영상소설처럼 느껴진다. 주인공이 사랑했던 여인의 잠자리 장면이 잠깐 동영상으로 비춰지는 순간을 제외하고는 모든 장면이 흑백 스틸컷으로 처리된 과감한 형식 때문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또 장르는 SF다. 서로간의 증오로 인해 지구를 파괴해버린 그 어느 미래. 아무것도 남겨진 것이 없는 세상에서 과학자들은 과거와 미래로 가서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고자 한다. 그 통로는 사람들의 꿈. 과학자들은 선택된 죄수들 중에서 그 임무를 수행시키려는 실험을 진행시키고 주인공은 과거와 미래를 오가며 그 임무를 수행한다. 그 임무 중에 만난 과거의 여인과 사랑에 빠진 주인공은 자신들의 세계로 오라는 미래의 인간들의 제안을 무시하고 과거로 돌아가 그녀와 재회하려 한다. 슬프기 그지없는 라스트신을 간직한 이 영화는 테리 길리엄에 의해 12Monkeys 라는 이름으로 부활한다.

Cat Women Of The Moon(1953)

예전에 감상한 정신없는 코미디 Amazon Woman On The Moon 이 이 영화를 패러디한 작품이라고 해서 호기심에 찾아본 영화. 역시 민망한 스토리, 민망한 연기, 민망한 특수효과의 3박자가 잘 갖춰진 50년대 ‘못 만들어진(Campy)’ 영화의 전형이었다. 인류최초로 다섯 명의 우주인들이 로켓을 타고 우주로 나가는데 성공한다. 그들의 목적은 달에 착륙하여 탐사를 하는 것. 그런데 홍일점인 Helen 은 달에 대한 이상한 꿈을 꾸었고 선장에게 달의 어두운 면에 가자고 우긴다. 그곳에 도착하여 일행은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곳에는 산소로 채워져 있었고, 거대한 거미도 있었고(좀 뜬금없긴 하다), 거기에다 이상한 고대문명의 흔적까지 있었다. 결정적으로 그곳에는 검은 옷차림의 고양이 여인들이 살고 있었다.

Cocoon(1985)

이 영화에 따르면 전설의 대륙 아틀란티스는 실존했던 대륙이었고 외계인들의 지구 전진기지였다. 영원한 삶을 영위하는 이 신비로운 외계인들이 어느 날 지구에 남겨진 그들의 외계인 동료(정확하게 말하자면 커다란 고치[cocoon]속에 잠들어 있는 외계생물체들)를 데려가기 위해 지구로 왔다. 그들은 배를 빌려 알을 건져내는 한편 그 알들을 임시로 얻은 저택의 수영장에 보관한다. 그런데 그 수영장은 이웃 양로원의 장난기심한 노인들의 놀이터였다. 이들 노인들은 새 주인에 아랑곳하지 않고 수영을 즐기는데 갑자기 원기가 왕성해지는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이로 인해 그들의 삶은 젊은이들의 삶에 못지않은 활기찬 삶으로 변신하게 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영생의 꿈이 실현된다는 설정의 독특한 소재의 SF 영화이다.

Slaughterhouse-Five(1972)

Kurt Vonnegut Jr.가 썼다는 원작에 대한 사전정보도 없이 영화 첫 장면을 보는 순간 ‘뮤직박스’유의 2차 세계대전에 대한 과거와 이를 반추하는 현재가 교차되는 스타일의 영화이겠거니 생각했다. 처음 얼마간은 이러한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약간 어리바리한 주인공 Billy Pilgrim 의 과거의 공간은 전쟁터 한가운데의 참호 속이었고 현재의 공간은 그러한 자신의 삶에 대한 회고록을 쓰고 있는 그의 집이었다. 그런데 영화가 진행됨에 따라 이러한 과거와 현재의 교차편집이 단순히 ‘Lone Star’에서 볼 수 있었던 솜씨 좋은 연출의 문제가 아님을 느끼게 되었다. 주인공 Billy 는 과거를 회상하는 게 아니라 실은 과거와 현재를 수시로 시간여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재밌는 발상을 시작으로 영화는 종반으로 갈수록 트랠파마도어라는 황당한 행성의 등장 등 처음의 전쟁영화 장르에서 블랙코미디, SF 까지 잡탕으로 섞인 다양한 장르적 실험이 되어버린다.

Electric Dreams, 컴퓨터는 믿을 만 한가


Blade Runner(1982년)의 진지한 팬이 들으면 약간 기분 나쁠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80년대 팝의 가벼움과 발랄함을 한껏 담고 있는 Electric Dreams(1984년)는 어떤 면에서 Blade Runner와 통하는 영화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Blade Runner의 원작은 Philip K. Dick의 “안드로이드는 전자 양의 꿈을 꾸는가?(Do Androids Dream of Electric Sheep)”이다. 그리고 Electric Dreams에서는 자유의지를 갖게 된 컴퓨터가 모니터에 양떼가 장애물을 뛰어넘는 꿈을 꾸는 장면이 나온다.  :)

무엇보다 두 영화가 가지는 공통점은 인공물이 인간과 같아지려는 욕망을 소재로 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렇지만 그 풀잇법에서는 차이가 분명하다. Blade Runner는 상징적 은유를 통해 인간조차도 (미지의 신이 창조한) 안드로이드일 수 있다는 음울한 메시지와 환원론을 전달하는 반면 Electric Dreams는 자유의지를 갖게 된 컴퓨터가 자살(?)을 통해 자신의 예외성을 포기함으로써 두 남녀의 사랑의 완성이라는 해피엔딩으로 끝맺는다.

간단한 줄거리는 이렇다. 주인공이 어느 날 첨단 컴퓨터를 구입하여 홈오토메이션을 구현한다. 컴퓨터가 커피도 끓여주고 문도 열어준다. 그러던 주인공은 어느 날 실수로 키보드에 샴페인을 쏟아 붓는다. 맛탱이가 간(?) 컴퓨터는 갑자기 의식이 생겨 스스로 생각하고 감정을 가지는 컴퓨터가 된다. 그리고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첼로 연주에 이끌려 그 첼로를 연주하는 여인을 사랑하게 된다. 문제는 컴퓨터의 주인, 곧 남자주인공도 그 여인을 사랑하게 된 것이다. 기묘한 삼각관계가 되어버린다.

이 작품은 또한 80년대 팝팬들에게는 하나의 축복이었다. 그 당시 가장 잘나가는 음악가  Georgio Moroder와 이른바 뉴로맨틱스 계열의 아티스트들이 뭉쳐 환상적인 사운드트랙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사운드트랙에 참가한 이들은 Culture Club, Heaven 17, ELO, Human League 등 당시 제일 잘나가는 아티스트들이었다. Georgio Moroder가 바흐의 미뉴엣 G 장조를 편곡한 Duel 이 흐르면서 컴퓨터와 여자주인공이 협연하는 장면은 꽤 유명한 명장면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로맨틱컴퓨터’라는 제목으로 비디오 출시되었었다.

Blade Runner, 기억은 믿을 만 한가


십 수 년이 훌쩍 지나 Blade Runner 를 다시 감상하였다. 제작된 직후부터 선풍적인 인기를 얻어 하나의 전설이 되어버린 영화이기에 새삼스럽게 상세한 작품소개 따위가 필요없을 것이다. 간단히 소개하자면 Philip K. Dick의 Do Androids Dream of Electric Sheep?을 원작으로 하여 Ridley Scott이 감독한 이 영화는 개봉이후 열광적인 광신도를 거느리게 되어 동시대에 이미 컬트가 되어버렸고, 무수한 헐리웃 SF에서부터 사이버펑크 계열의 저패니메이션까지 수많은 작품의 자양분이 된 작품이다.

이 영화는 ‘기억’에 관한 영화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억은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기억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인지 … 마치 장자의 꿈이나 뫼비우스의 띠, 에셔의 그림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상황이다. 인조인간들은 그들이 인간임을 믿는 근거로 그들의 추억을 들고 있지만 그것은 조작된 것이라는 것이 이 영화의 설정이다. 그렇다면 진짜배기 인간들의 추억이 조작되지 않았다는 근거는?

여기까지 가봤던 영화가 The Matrix와 Memento가 있다. 전자의 경우 우리의 기억은 송두리째 거짓일 수도 있다는 충격적인 교리를 설파하고 있고, 후자의 경우 과거의 추억은 현재의 편리에 의해 얼마든지 재배열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사실 영화라는 장르에서 수많은(정말 수많은) 작품이 ‘기억’을 어떤 식으로든지 작품의 플롯을 꼬는데 주요한 매개체로 사용해 왔고 바로 그 ‘기억’이 누군가에 의해 인조인간의 인공지능에 심어졌다는 아이디어가 바로 이 영화를 사이버펑크의 고전으로 등극시킨 오리지날리티였다.

다시 Blade Runner의 스토리로 돌아가서 결국 Rachel 이든 Nexus 6 무리든 그들은 원하지 않은 탄생에서부터 원하지 않는 죽음을 두려워 한 가련한 존재들이었다. 인간이 아니기에 천국에(천국이 있다면) 갈 자격마저 없을지도 모르는 존재였다. 한때 인간이 아닌 동물로 규정되었던 흑인노예들처럼. 그러니 결국 경찰입네 뽐내고 다니던 Rick Deckard는 Tyrell 회사라는 노예상 자본가를 위해 도망간 노예를 쫒는 노예사냥꾼에 불과하다. 그래서 이 영화의 주인공은 사실 해리슨포드가 맡은 Deckard가 아니라 룻거하우어가 연기한 Roy다(‘뿌리’의 SF버전?^^).

추1. 예전 비디오로 영화를 감상하던 시절 우리나라 출시 비디오의 기막힌 자막은 가끔씩 화제가 되곤 했었는데 이 작품도 ‘기막힌 자막 탑3’에 충분히 낄 정도로 기막히다. Deckard 와 Rachel의 정사 장면에서 둘이 “I want you” 라는 대사를 주고받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에서 번역자는 Dekard 의 “I want you” 는 “너를 원해”라고 번역했고, Rachel의 “I want you”는 “드리고 싶어요”로 번역했다.

추2. 이 영화는 소위 Director’s Cut 의 붐을 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하다. 영화의 전반적인 방향에 대해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던 감독은 1990년의 재개봉에 대해 불만을 표시했고 제작사는 전격적으로 그에게 전권을 일임하여 감독이 편집에 권한을 행사하게 자유를 주었다. 그 결과 감독의 주제의식은 보다 선명해졌고(예를 들어 결말의 종이접기 유니콘의 의미 등) 수많은 광팬들의 환호가 이어졌다. 이후 많은 영화에서 Director’s Cut 이 하나의 마케팅 카피로 자리 잡게 되는 희한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다. 하지만 잘 아시겠지만 아무 영화나 감독이 커팅한다고 좋은 작품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추3. 역시 80년대에 제작된 로맨틱코미디 Electric Dreams라는 영화가 있다. 와인을 먹은(?) 컴퓨터가 의식이 생겨 어느 여인을 짝사랑하게 된다는 황당한 내용인데 이 영화에 자유의지를 갖게 된 컴퓨터가 모니터에 양떼가 장애물을 뛰어넘는 꿈을 꾸는 장면이 나온다. 바로 이 영화의 원작 제목인 Do Androids Dream of Electric Sheep?를 재밌게 풍자한 장면이다.

Metropolis

이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은 역시 사악한 – 한편으로 연민을 자아내게 하는 – 과학자 로트왕 Rotwang 이 자신의 창조물인 로봇을 살아있는 여인 마리아로 변신시키는 과정일 것이다. 1920년대 작품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인간으로 변해가는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한편으로 감독 프리쯔랑 스스로가 이 영화를 통해 자신의 능력이 신의 능력에 버금가고자 하는 그 무엇이라고 – 영화를 통한 바벨탑? – 뽐내고자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해본다.

어쨌거나 이 장면은 이 영화가 전체적으로 가지고 있는 이야기 틀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즉 인공적인 로봇이 인간 – 물론 가짜 인간이긴 하지만 – 으로 변해가는 과정은 사람이 만든 사회구조를 신이 창조한 자연의 질서와 비유함으로써 서로 그럴듯하게 맞아떨어지는 상황을 그럴듯하게 암시하고 – 또는 정당화시키고 – 있다.

영화는 노골적으로 성경의 신화를 차용하고 있다. 마리아라는 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여자주인공인 마리아 Maria 의 이미지는 성모 마리아로부터 – 또는 막달라 마리아와의 혼합? – 빌려 왔다. 이른바 중재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프레데어 Freder 는 명백히 예수를 상징하고 있다. 마리아로 변신한 로봇은 일종의 적(敵)그리스도라 할 수 있다. 모든 인물들이 그렇게 성경에 적절하게 부합하고 있다.

한편으로 이 영화는 산업사회의 자본가와 노동자의 적대적인 관계를 뛰어난 영상 이미지로 전개시켜 후대 영화인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도 유명하다. 과연 그 음습한 표현주의적 영상은 과연 내가 저런 사회에서 (노동자로) 살면 얼마나 끔찍할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우리를 소름끼치게 한다.

이제 문제는 이 영화가 이 두 가지 이야기를 – 신(神)의 이야기와 인간의 이야기 – 어떻게 조화시켰는지의 여부인데 불행하게도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그리 썩 바람직하지 않은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즉 영화는 결국 이미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듯이 자본가를 대표하는 프레데슨 Frederson 은 성경의 신(神)으로, 폭동을 일으킨 노동자들을 인간으로 비유하면서 프레데슨의 아들인 프레데어를 중재자로 내세워 둘이 악수를 하게 만든다. 결국 자본가는 타도의 대상이 아니라 너무나 손쉽게 화해의 대상 – 또는 복종의 대상 – 으로 바뀐다. 폭력혁명을 부추기던 가짜 마리아는 노동자들에 의해 화형 당한다. 가짜 마리아에 동조했던 노동자들은 무분별했던 러다이트에 불과했다.

결국 이 영화는 산업사회의 계급관계에 대해 영상에 있어서만큼은 더 이상 불만을 제기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이미지로 형상화한 측면은 있지만 그것의 해법에 있어서만큼은 너무나 순진하게도 – 또는 의도적이게도 – 그 관계맺음을 자연의 질서로 환원시켜버리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이 로봇이 마리아로 변화하는 과정은 인간이 만든 질서가 신이 만든 질서와 동일시되어가는 영화 전체의 맥락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고로 노동자들은 자본가의 손 한번 잡아보고 계속 암흑이 짙게 깔린 지하 노동자 도시에서 살아가면 될 것이다.

Slaughterhouse-Five

Kurt Vonnegut Jr.가 썼다는 원작에 대한 사전정보도 없이 영화 첫 장면을 보는 순간 ‘뮤직박스’유의 2차 세계대전에 대한 과거와 이를 반추하는 현재가 교차되는 스타일의 영화이겠거니 생각했다. 처음 얼마간은 이러한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약간 어리바리한 주인공 Billy Pilgrim 의 과거의 공간은 전쟁터 한가운데의 참호 속이었고 현재의 공간은 그러한 자신의 삶에 대한 회고록을 쓰고 있는 그의 집이었다. 그런데 영화가 진행됨에 따라 이러한 과거와 현재의 교차편집이 단순히 ‘Lone Star‘에서 볼 수 있었던 솜씨 좋은 연출의 문제가 아님을 느끼게 되었다. 주인공 Billy 는 과거를 회상하는 게 아니라 실은 과거와 현재를 수시로 시간여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재밌는 발상을 시작으로 영화는 종반으로 갈수록 트랠파마도어라는 황당한 행성의 등장 등 처음의 전쟁영화 장르에서 블랙코미디, SF 까지 잡탕으로 섞인 다양한 장르적 실험이 되어버린다. 이것은 이미 솜씨 좋은 원작이 지니고 있었을 멋진 개성이 ‘스팅’이나 ‘내일을 향해 쏘아라’, 그리고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헨리오리엔트의 세계’를 감독했던 거장 조지로이힐의 뛰어난 연출력과 만나면서 빚어낸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영화의 메시지는 독일의 아름다운 도시 드레스덴에 전쟁포로로 머물렀던 Billy 의 경험을 통해 전쟁에서의 살육에는 어떠한 명분도 있을 수 없다는 반전(反戰)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영화제목 제5도살장(Slaughterhouse Five)은 주인공이 일했던 도살장이기도 하지만 1945년 2월 13일 연합군으로부터 융단폭격을 받고난 후의 드레스덴의 처참한 몰골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거니와 Five 라는 단어는 마치 우주선의 이름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Billy 가 나중에 찾아가게 되는 – 또는 되었다고 주장되어지는 – 트래팔마도어의 달표면과 같은 거친 표면은 또 바로 폭격 직후의 이 드레스덴을 연상시킨다. 그 황량한 별에서의 Billy 의 새로운 사랑은 절망 속에서의 희망이라는 여운을 남겨준다.

굴렌굴드의 서정적인 피아노 연주를 배경으로 눈길을 걸어가던 Billy 의 모습을 담은 첫 장면이 오랜 여운을 남기며, Catch 22 나 M.A.S.H 같은 영화와 잘 어울리는 삼총사가 될 것 같은 느낌의 영화였다.

2007.4.8

혁명가와 연쇄살인범이 만난다면, Time After Time

이 영화는 대단히 흥미로운 실험을 시도하고 있다. 즉 이 작품은 역사상 실재 존재했던, 그러나 서로 만난 적이 없는 H.G. Wells 와 Jack The Ripper 라는 두 인물을 만나게 함으로써 그들이 어떻게 상호작용 하는가를 가상으로 그려보고 있다. H.G. Wells 는 역사상 가장 유명한 SF소설가이자 사회주의적 신념을 가지고 있던 사상가이다. Jack The Ripper 는 19세기 말 영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그러나 여전히 정체가 알려지지 않은 연쇄살인범이다. 영화에서는 John Leslie Stevenson 이라는 이름의 의사인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들은 영국의 빅토리아 왕조라는 동시대를 살았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지만 그보다는 차이점이 더욱 극명하다. 즉, 이 영화의 선악(善惡)구도에서 H.G. Wells 는 선한 쪽을, Jack The Ripper 는 악한 쪽을 맡고 있는 동시에, 폭력을 인류의 역사에서 몰아낼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 있어 H.G. Wells 는 몰아낼 수 있다는 이를테면 성선설(性善說)을, Jack The Ripper 는 당연하게도 몰아낼 수 없다는 성악설(性惡說)을 대표하고 있다.

1893년의 어느 저녁 H.G. Wells 는 친한 친구 John Leslie Stevenson를 비롯한 가까운 지인을 불러다놓고 놀라운 사실을 발표한다. 그것은 그가 타임머쉰을 발명하였으며 그것을 타고 미래로 날아갈 것이라는 것이었다. 신념강한 사회주의자였던 Wells 는 3세대 이후 미래로 가서 전 세계가 차별과 전쟁이 없는 사회주의 국가가 구현된 것을 직접 목격하고 오겠다는 결심이었다. 일단 모든 이들이 타임머쉰이 실제 가동할 것이냐에 대해 회의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으며 특히 연쇄살인범으로 폭력적 본능을 내재하고 있는 John 은 정치체제에 의해 인류의 역사에서 폭력이 제거될 수 있으리라는 Wells 의 생각을 순진한 생각이라며 비웃는다. 그런데 때마침 근처에서 John 이 저지른 살인 때문에 경찰이 가택수색을 하기 위해 Wells 의 집을 방문하였다. 이에 놀란 John 은 모두가 경황이 없는 와중을 틈타 타임머쉰을 타고 미래로 가버린다. 이를 알아챈 Wells 는 그를 쫓아 미래로 향하는데 그 곳은 바로 1979년의 샌프란시스코였다. 이곳에서 John 을 뒤쫓는 과정에서 Wells 는 미래사회가 그가 꿈꾸었듯이 폭력이 제거된 사회가 아니라 오히려 개인과 국가의 폭력이 대규모화된 사회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Wells 와 마주치게 된 John 은 Wells 에게 자신의 생각이 옳았음을, 그리고 이 거대한 폭력사회에서 자신은 아마추어에 불과하다고 조롱한다. 결국 John 은 미래사회에서조차 연쇄살인을 저지르고 Wells 와 사랑에 빠진 여인 Amy 마저 죽이려 하나 Wells 의 손에 의해 제거된다.

이 영화가 데뷔작이었던 감독 Nicholas Meyer가 직접 시나리오를 담당하였고 Malcolm McDowell, David Warner 등 지극히 영국적인 색채의 두 배우가 각각 Wells와 Jack The Ripper 를 연기하고 있다. 감독은 극명히 대비되는 두 실존인물을 한 시공간에서 충돌시키면서 어떻게 둘이 상호작용을 하는지 관찰하고 있는데 결국 기승전결 상에서 악(惡)은 제거되지만 인류의 역사에서 폭력을 제거될 수 없다는, 오히려 더욱 구조화되고 대규모화되었다는 회의적인 실험결과를 내놓고 있다. 이는 Jack The Ripper 의 생각이 옳다는, 그럼으로써 그가 실은 이 영화의 승자는 Jack The Ripper 라는 역설로 귀결되고 있다. ‘제5원소’의 Leeloo 처럼 Wells 역시 TV와 영화 속에서 펼쳐지는 폭력장면에 몸서리친다. 개인적으로 ‘폭력의 대규모화’라는 측면에서 감독의 관점에 동의하지만 적어도 현대사회가 이전 시대에 비하여 개인과 국가의 무제한적 폭력을 인본주의적 관점에서 제어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반드시 비관적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는 Wells 가 샌프란시스코에서 겪게 되는 사회담론의 변화에 대해 문화적 충격을 받는 에피소드에서도 그러하다.

학생시절 반전(反戰)운동을 했던 이혼녀 Amy 의 리버럴한 사고방식은 자유연애를 주장하며 빅토리아 시대에 가장 급진적이었던 Wells 를 일순간에 고답적인 사고방식으로 만들고 만다. 인류 진보의 이데올로기가 여성해방, 인종차별철폐 등의 다양한 신좌파적 운동으로 진화해나가는 과정을 겪지 못한 19세기 사회주의자의 문화충격인 셈이다. 다만 이러한 모든 차별에 대한 철폐 과정 역시 앞서 폭력이 그러한 것처럼 제도는 그렇게 바뀌되 현실은 그에 못 미치는 혼돈의 과정을 겪고 있을 따름인 것이다. 인류의 역사가 진보의 방향을 운명 지워져 있다는 종교적 신념은 아니더라도 아직은 희망을 버릴 필요는 없을 것이다.  

역시 Malcolm McDowell 이 출연했던 A Clockwork Orange 처럼 폭력이 인간의 본성에 차지하는 위치에 대한 관찰기인 이 영화에서의 승자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는 보는 관점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범죄의 세계사’의 저자 콜린윌슨의 말마따나 폭력은 제거될 수 있다는 희망은 사회생물학적인 관점에서 지극히 순진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그것은 통제되고 억제되어야 한다는 – 또는 될 수 있다는 – 당위에 있어서는 개인적으로 오히려 체제화된 통제가 또 다른 폭력을 낳을 것이라는 무정부주의적인 입장의 A Clockwork Orange 의 입장보다는 극중 H.G. Wells 의 입장을 지지하고 싶다.

* 60년대와 70년대 샌프란시스코는 제1세계에서 가장 리버럴하고 좌익적인 도시였다는 점에서 감독의 로케이션은 의도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만약에 Wells 를 스스로를 사회주의라 칭한 소련 땅에 떨어뜨려 놨으면 어땠을까? Wells 가 볼쉐비키 혁명 이후 실제로 소련을 방문한 적이 있긴 하지만 이 영화에서 그랬다면 스토리가 너무 복잡해졌을 것이다.  

** 이 영화에서 Jack The Ripper 의 첫 살인은 1893년인 것으로 나와 있지만 실제로 그가 다섯 건의 살인을 저지른 시기는 1888년이다.

*** 감독은 셜록홈즈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쓰기도 했는데 이는 코난도일 이외에 다른 사람이 쓴 중 가장 훌륭한 셜록홈즈 소설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