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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cean’s 13 中에서

범죄영화라기보다는 하나의 스타일리쉬하고 깔끔한 게임과 같은 영화여서 범죄자들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음에도 꽤나 장난기를 많이 부리는 영화다. 한 예로 오션스 12에서는 줄리아로버츠를 출연시켜놓고는 줄리아로버츠 인양 연기를 하라는 배배 꼬인 상황을 연출하는데 바로 이 짓궂음이 또 이 영화만의 매력이기도 하다. 오션스 13에서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역시 기존 영화의 대사를 패러디하는 등의 장난기를 선보인다. 특히 귀가 솔깃했던 장면은 멕시코에 파견된 동료들과의 전화대화였다. 일행 중 두 명이 조작된 주사위를 만들기 위해 멕시코의 하청공장으로 파견되었으나 노동자들이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바람에 계획에 차질을 빚게 된다. 전화를 받던 다른 일당이 하는 소리가 “그들은 빵도 원하지만 장미도 원한다는군.”이라고 이야기한다. 이는 바로 Ken Loach 감독의 작품 ‘빵과 장미’를 패러디한 장면이다. 결국 일당들이 회의를 하는데 하나가 그들이 원하는 임금인상액이 얼마냐고 물었고 다른 이가 3만6천 달러라고 대답했다. 물은 이는 “3만6천 달러면 200명이니까 모두 합쳐” 어쩌고 하자 대답한 이 왈 “그들 모두 합쳐 3만6천 달러야.”하자 모두들 어이없어 한다. 단위가 틀린 돈 놀음을 하고 있는 영화 속 등장인물에게는 도저히 와 닿지 않는 비참한 현실이지만 실은 그게 현실이고, 한때 꽤나 진지했던 소더버그가 나름 그런 의도로 가벼운 웃음 속에 뼈있는 에피소드를 집어넣은 게 하는 생각이 들어 몇 자 적어본다.

뒤늦게 본 Batman Begins

Batman Begins Poster.jpg
Batman Begins Poster” by May be found at the following website: IMP Awards. Licensed under Wikipedia.

고백하건데 지난번 The Dark Knight 에 대해 제법 거창한(?) 리뷰를 적었는데 사실 그 전편격인 Batman Begins 는 어제서야 봤다.(이게 뭐 고백해야할 거리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 그래도 지금 돌이켜보니 좀 읽을 만하다 싶은 리뷰들은 거의 Batman Begins 를 보신 분들이나 아예 초기 Batman 의 캐릭터에 대해 꿰뚫고 계신 분들의 리뷰였다는 점에서 뒤늦게 수퍼히어로 문외한으로서의 리뷰가 약간은 낯부끄럽기도 하다.

어쨌든 어제 감상한 Batman Begins 를 토대로 다시 감독의 의도나 그의 철학(?)을 반추해보자면 The Dark Knight 까지 폄하할 필요는 없겠으나 감독의 전체적인 세계관은 약간은 과대평가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Batman Begins는 실망스러운 작품이었다. 뭐 물론 The Dark Knight 을 너무 재밌게 봐서 겉멋만 들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또한 팀 버튼 작품 이후로는 Batman 을 안 봐서 그 전의 Batman 시리즈가 얼마나 후져졌는지, 그에 비하면 놀란의 작품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안 겪어봐서(?) 그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선입견을 배제한다고 가정하고 – 그렇게 하려고 무진장 애를 쓰고 – 이 작품을 보자면 나에게는 그저 짝퉁 사무라이 영화 내지는, 그 일본무사도의 잔상이 짙게 드리워진 스타워즈의 Batman 외전(外典)에 가깝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영화를 보신 분들은 왜 내가 이런 말을 하는지 잘 아실 것이다.

극 초반 브루스 웨인은 자신의 부모를 죽인 범인에 대한 씻을 수 없는 증오감, 그리고 이로부터 연역되는 범죄에 대한 혐오감을 어떻게 배출할 것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느라 중국 어느 교도소에 갇혀 있었다. 그러던 중 난데없이 헨리 듀카드라는 인물이 나타나 그에게 이정표를 제시한다. 결국 그를 찾아가 고도의 무술수련을 쌓는데 이 부분에서 닌자의 수련기법이랍시고 흉내 내는 것이 영락없이 스타워즈의 일본 모방과 판박이였던 것이다. 게다가 듀카드 배역을 리암 니슨이 맡았으니 결국 브루스 웨인은 오비완 케노비(이완 맥그리거)와 사형 지간 아닌가 말이다.

결국 듀카드가 또 구루로 모시고 있는 – 국적 불명의 – 라스알굴은 수련을 마친 브루스 웨인에게 살인자를 처단하라는 본 얼티메이텀에서 제이슨 본이 겪었던 상황과 똑같은 상황을 강요한다. 하지만 웨인은 본과 달리 일말의 갈등도 없이 이를 거부하고 여태 그를 가르친, 그리고 그의 수련을 묵묵히(!) 도와준 수많은 고수들을 정말 어이없을 정도 가볍게 물리치고, 수련장까지 홀라당 불태워버리고는 고담으로 날아와 정의의 사도 Batman이 된다. 물론 최후의 악당이 누가 될지는 안 봐도 비디오겠지.

여기까지 특별한 스포일러 없었다고 자위한다. 뭐 도입부까지만 이니까.

이후 스토리는 대강 짐작할 수 있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물론 이번에도 The Dark Knight 에서처럼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가 아닌가, 인간은 구원받을 자격이 있는가 아닌가 하는 약간은 철학적(?)인 문제로 두 큰 세력이 갈등한다. 구원이 어렵다고 생각하는 세력은 강력한 무기를 바탕으로 총공세를 펼치고 Batman 은 이를 스릴감 있게 막아낸다. 끝나고 난 후의 느낌은 그런대로 무난한 작품이었다. 애초의 실망감은 당초 기대감이 컸기 때문이다. 코믹스를 앞에 두고 철학서를 대하는 마음자세였던 것이 문제다.

영화를 보면서 그 안의 메타포나 시대적 맥락을 훑어보는 것도 의미가 있는 작업이지만 이것도 어떨 때에는 과유불급이다. 그러다보면 영화 자체에 매몰되어 그 프레임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오류를 범할 수도 있다. 그런 예를 한번 살펴보자. The Dark Knight에서 조커가 유사 ‘죄수들의 딜레마’ 게임 같은 복잡한 짓을 하지 않고도 Batman 을 이길 수 있는, 즉 자신의 인간관을 증명시킬 확실한 방법이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그 방법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것은 어떤 방법이고 왜 그 방법을 쓰지 않았을까?

극중에서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태워버린 돈을 헬기로 공중에서 뿌리면 되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의리고 애정이고 간에 돈 줍느라 피터지게 싸웠을 것이고 도시는 과잉유동성 공급으로 인해 시장이 마비되었을 것이고, 이 와중에 잘 하면(?) 브루스 웨인의 사업체도 망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렇게 되면 영화가 액션물이 아닌 경제 드라마인 찰리 쉰이 주연한 월스트리트 같은 작품이 되어버렸을 것이다. 조커는 자신의 승리 대신 영화를 살린 것이다. 빛나는 희생정신!

The Dark Knight

WARNING!! 스포일러 만땅

히스레저의 급작스러운 죽음과 그가 이 영화에서 보여준 광적인 연기가 입소문으로 퍼지면서 개봉도 하기 전에 준(準,quasi)신화적인 존재가 되어 블록버스터 컬트라는 새로운 길을 개척해버린 영화.  The Dark Knight을 오늘 화면발 죽이는 아이맥스로 감상했다.

보통 이런 액션영화는 좀 근사한 크레딧타이틀이나 큰 줄거리와는 상관없지만 보는 이의 심장박동수를 증가시키는 호쾌한 액션씬을 첫머리에 집어넣기도 하는데 – 007시리즈의 특기지 – 이 영화는 어영부영하지 않고 바로 본문으로 들어가 조커가 은행을 털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장면부터 시작한다.(주1)

영화는 이후 배트맨과 조커, 그리고 또 하나 외연을 확장하자면 정의감 넘치는 검사에서 투페이스로 전락해버린 하비 덴트의 삼각구도로 진행된다. 이 셋은 기묘하게도 서로 서로 공유하는 것들이 겹친다. 배트맨과 하비 덴트는 정의감을 공유한다. 배트맨과 조커는 어둠을 공유한다. 그리고 조커와 하비 텐트(정확하게는 투페이스가 되어버린 하비 덴트)는 광기(狂氣)를 공유한다.

이렇게 한 인물이 다른 두 인물의 공통점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셋은 끊임없이 반목하게 된다. 조커는 알량한(!) 정의감이 없어서 도시를 휘젓고 다닐 수 있다. 하비 덴트는 어둠 속에 존재할 수 없는 시스템의 남자여서 배트맨에게 불법적인 납치를 부탁한다. 배트맨은 어쩔 수 없는 냉정함 때문에 조커의 광기와 하비 덴트가 투페이스가 되면서 폭발한 광기를 말리기 위해 혼자 오지랖 넓게 동분서주 바쁘기만 하다.

그러면서도 정작 조커를 죽일 수 있는 순간이 되어도 정의감이라는 후천적 뇌종양 증세 때문에 무슨 아시모프 소설에 나온 인간을 죽일 수 없는 로봇이라도 되는 마냥 주먹을 거둔다. 게리 올드맨이 열연한 고든 경찰서장은 아들에게 이런 배트맨을 ‘어둠의 기사(Dark Knight)’라고 칭송하지만 내게는 왠지 냉소적인 조롱으로 느껴진다.(주2)

조커는 비이성(非理性)과 비합리(非合理)가 무기인 녀석이다. 그의 행동반경은 랜덤하고 생각역시 그러하다(물론 계획은 치밀하다. 이러한 점에서 그 역시 절대적인 혼돈 그 자체는 아니다). 오죽하면 돈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불을 질러버린다. 전통적인 악당들에게도 경악 그 자체다. 오직 하나의 동기가 있다면 배트맨과 재밌게 놀고 싶었을 뿐이다.(주3)

그래서 조커는 배트맨이 모토사이클을 몰고 달려드는 순간에도, 빌딩에서 집어 던져버려도 재밌어서 깔깔 웃어대기만 한다. 죽일 테면 죽여보라는 심산이었다. 그저 재밌어서 배 두 척을 상대로 ‘죄수의 딜레마’게임을 벌이기도 했고(주4), 하비 덴트를 투페이스로 만들어버렸다. 그런데 결국 배트맨은 그런 행동반경이 파리 같은 녀석 하나 처치를 못했다. 결국 어찌 보자면 패자는 배트맨이다.

결국 이 영화는 수많은 명배우들의 연기경합, 제이슨 본 시리즈를 연상시키는 ‘낮은 톤(low tone)’의 연이어지는 긴장감, 그리고 수퍼히어로의 맛깔스러운 재해석으로 – 전문가가 아닌지라 걸작까지는 잘 모르겠고 – 수작의 반열은 거뜬히 뛰어넘은 것으로 여겨진다.

추.

이 영화가 현실 자본주의, 또는 문명세계의 메타포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떤 유명한 리뷰어는 배트맨이 자경단이자 자본가라는 사실을 이야기의 발화점으로 삼고 있던데 이건 원작이 생겨먹기를 그렇게 생겨먹은 것이고 원작자가 그러한 것에 큰 염두는 두었다고는 여태까지 생각해본 적이 없다. 다만 뭔가 프로이트적인 분석을 하기 시작하면 혐의를 둘 수도 있겠다. 더불어 현실세계는 영화가 그리고 있는 것처럼 ‘정의’라는 것이 순수결정체도 아니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실존하는 배트맨이 하나 있긴 하다는 것이다. 바로 자본주의로 거부가 되고도 끊임없이 자본주의를 저주하는 조지 소르스

 

주1) 이 은행털이 에피소드에서 호기 있게 강도와 대적하는 아저씨가 바로 프리즌브레이크2에서 석호필 형과 맞장 뜨는 형사 아저씨기에 적잖이 기대했는데 맥없이 당하고 만다.

주2) 기사(Knight)가 또 원래 그렇게 정의감 넘치는 족속들도 아니다.

주3) 현대 소프트웨어 운동의 그루로 추앙받는 리누스 토팔즈(Linus Torvalds)가 쓴 책 제목이 ‘그냥 재미로’인데 그는 궁극적인 발전의 동기를 ‘재미’라고 보았다. 그는 그저 재미있어서 Linux 소스를 공개했고 많은 이들이 이 소스를 역시 재미로 같이 손보아서 이 정도로 만들어 놓았다. MS적인 이윤동기로 설명되지 않는 대목이다. 무언가를 재미로 하는 애들은 못 말린다. 이를테면 블로거나 오타쿠

주4) 나도 이 장면을 보면서 ‘죄수의 딜레마’를 떠올렸고 집에 와서 검색해본 리뷰에서도 ‘죄수의 딜레마’가 언급되어 있는 글이 꽤 있으나 엄밀히 말해 정통적인 ‘죄수의 딜레마’와는 다른 상황이라고 판단된다. 즉 정통적인 상황에서 수사관, 즉 죄수를 징벌할 수 있는 이는 죄수에 대한 정보의 비대칭성으로 말미암아 수세적 상황에 놓여있다. 그러나 조커는 이 상황을 완벽하게 콘트롤하고 있었다. 양쪽 배에서 죄수의 딜레마 게임을 이겼다고 치더라고 조커가 기폭장치 한번 눌러버리면 상황 끝이다. 그들의 정의감은 헌 신짝만도 못한 것이 되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 상황에서 죄수가 기폭장치를 강물로 던져버리는 설정은 너무 작위적이었다. 감독 조차도 인간성을 신뢰한 것인지 아니면 제작사의 압력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주5) 개인적으로는 게리올드맨과 마이클케인의 등장이 반가웠다. 마이클 옹 너무 늙으셔서 안타까웠고 레이첼의 편지를 펼쳐볼 때 발견한 그의 산도적 같은 손은 약간 실망이었다.

추격자

감독은 피해자들을 착취한 포주와 피해자들을 살해한 연쇄살인자와의 싸움을 하는 부조리한 상황을 연출해놓고 우리에게 포주를 편들도록 하는 상황으로 몰아붙이고 있다. 포주의 행동이 피해자들에 대한 복수라기보다는 자신의 재산권에 대한 보호 차원임일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말이다. 한편으로 감독은 영리하게도 포주는 전직경찰에다 인간쓰레기라는 설정을 통하여 포주가 형사 못지않은 추리력을 선보여도, 범죄자 못지않은 야비한 폭력을 휘둘러도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도록 복선을 깔아놓았다.

이토록 포주의 개인사가 복잡다단한데 반해 정작 연쇄살인자의 살인동기는 너무 식상하고 그의 트라우마는 놀랍도록 단순하다. 사실 이는 영화의 단점이자 동시에 미덕이기도 하다. ‘양들의 침묵’이래 우리는 연쇄살인자의 기묘하고 충격적인 삶의 그림자에 대해서는 익히 알만큼 알고 있고 또 다른 영화에서 또 그 고리타분한 살인의 변명을 듣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냥 망치로 조지는 장면만 연출하면 나머지는 관객들이 알아서 상상하면 된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텍사스 전기톱 연쇄살인사건’의 담백함을 오마주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특히 시체를 쇠꼬챙이에 걸어놓는다는 설정에서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김윤식은 ‘타짜’에서 선보였던 야비함을 extended version 으로 무리 없이 선보였고 하정우는 비록 박해일이 자꾸 오버랩 되기는 했지만 나름의 훌륭한 연기를 선보였다. 특히 경찰서에서 수줍은 듯한 미소를 지으며 범행을 자백하는 장면이 일품이었다.

The Italian Job[1969]

요즘 60~70년대 영국 영화를 즐겨 보다보니 이 시기에 Michael Caine이 없었더라면 영국 영화계는 – 특히 액션물이나 스릴러물 – 어떻게 버텨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그에 대한 의존도가 절대적임을 알게 되었다. 1967년부터 1년에 한 번씩 나온 Harry Palmer 삼부작, 형의 죽음에 잔인하게 복수극을 펼치는 Get Carter, 그리고 지금 소개하는 The Italian Job 에 이르기까지 이 시기에 James Bond 역만 안했다 뿐이지 웬만한 액션물 캐릭터는 전부 그의 차지였던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감옥에서 갓 출옥한 Charlie에게 자동차 사고로 죽은 친구의 미망인이 소포를 하나 전해준다. 그것은 이탈리아의 FIAT 회사 소유의 400만 달러어치 금을 강탈할 수 있는 계획이 담긴 가방이었다. 굴러들어온 행운을 거머쥐기 위해 그는 같은 감옥에 있었던 암흑계의 거물 Bridger씨에게 재정적 지원을 부탁한다. 사업성을 검토하고 가능성을 확인한 Bridger씨는 사업을 승인하고 Charlie는 여기저기 사람들을 끌어 모으고 필요한 장비들을 갖추기 시작한다.

그가 계획하고 있는 것은 금괴호송차량을 고의로 유발시킨 교통체증에 가둔 뒤 금을 강탈하여 기동성이 뛰어난 미니 쿠페로 빠져나와 스위스까지 도망친다는 것. 이탈리아 마피아의 위협도 있었고, 팀원들 간의 반목도 있었지만 Charlie의 배짱과 순발력으로 마침내 금괴를 탈취하고 일행은 스위스로 향하는 산맥을 버스로 건너며 신나게 샴페인을 터뜨린다. 과연 이들은 이 대담한 작전을 성공시킬 것인가?

이 작품은 비전형적인 캐릭터로 가득 찬 전형적인 영국식 블랙코미디다. 범죄자들은 마치 귀족이라도 되는 마냥 멋진 양복 차림에 깔끔한 매너를 지닌 이들이다. 범죄 집단은 마치 대기업의 사무실처럼 깔끔한 환경에서 비서를 거느려가며 범죄를 모의하는 회의를 진행한다. 반면에 감옥의 간수들은 죄수인 Bridger가 마련해준 집에 살면서 그의 몸종이나 다름없는 비굴한 직장인들일뿐이다. 냉소적인 유머의 하이라이트는 Charlie 일행이 이탈리아에서 금괴를 빼돌리는데 성공한 순간이다. 그 순간 Bridger가 갇혀 있던 감옥에서는 죄수, 간수 할 것 없이 작전의 성공을 축하하며 환호하며 Bridger를 칭송한다. 통상적인 권선징악의 영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장면이다.

잠시 옆길로 새자면 이 영화의 제작목적은 어쩌면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인류의 탐욕의 역사의 진실을 일깨워주고자 함일지도 모른다. 이른바 근대 이전의 역사에서 사실 이 영화에서 보는 것과 같은 약탈행위는 범죄가 아니었다. 대부분의 영화나 소설에서 보는 것과 달리 악랄한 해적과 정당한 공권력은 다른 집단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한 나라의 무역선은 다른 나라의 무역선을 보면 얼마든지 약탈을 감행하였고 그 다른 나라 역시 그러했다. 그래서 심지어 이들은 해적선을 정당한 포로로 대우하기까지 했다.

왕실은 겉으로는 해적행위를 비난하였지만 그들의 해적행위에 투자해 배당금을 받기까지 했다. 합법적 수탈행위와 불법적 수탈행위 사이에는큰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비추어보면 컬럼버스는 사실 위대한 모험가가 아닌 약탈자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를 위대한 영웅으로 조명하고 있는 역사에 비추어 보면 Charlie는 영국의 국익을 위해 이탈리아의 금괴를 탈취해온 신중상주의적인 영웅이고 Bridger는 그에게 투자한 왕실이다. 그러니 사실 감옥에서의 환호는 당연한 것이었다.

Mark Walberg 주연으로 리메이크된 작품에서도 그렇듯이 역시 이 영화의 볼거리는 (영화 덕에 매출이 엄청 뛰었을) 미니 쿠페의 활약이다. 좁은 이탈리아 소도시의 골목을 누비는가 하면 심지어 건물의 옥상, 하수관, 그리고 강둑까지 종횡무진 하는 미니 쿠페의 카레이스는 대형차량으로 저돌적으로 직진하는 미국영화의 카레이스 장면과는 또 다른 독특한 맛의 카레이스 장면을 연출하여 영화의 재미를 배가시켰다. 그러다보니 쓸데없는 스턴트까지 선보이고 있기는 하지만…

결론적으로 이 작품은 Get Carter와같이음울하고 비정한 범죄 액션물이라기보다는 Austin Powers가 재현하려고 했던 흥청망청거리는 60년대 영국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담아내면서 동시에 약간의 애국주의적 정서를 담고 있는 액션 코미디물이라 할 수 있다.

** 그들의 범죄가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의 여부를 알 수 없는 엔딩 장면은 권선징악적인 반전을 선보이던 일링 스튜디오의 블랙코미디와는 또 다른 관점을 선보이고 있다. 특히나 황금을 선택할 것인가 생명을 선택할 것인가의 갈등을 시각적으로 표현했다는 점에서 너무나 멋진 상황설정이 아닌가 싶다.

자본주의 경영학 지침서, American Gangster

<주의 : 스포일러 덩어리>

American Gangster는 일종의 경영학 지침서다. 할렘의 흑인 보스의 보잘 것 없는 운전사가 어떻게 거물로 성장하였는지 그리고 어떻게 인재를 활용하여 자기 인생을 개척해나가는지에 대한 케이스스터디용이라 할 수 있다.

영화는 흑인임에도 전설적인 마약상으로 활약하였던 실존인물 Frank Lucas 의 인생을 다루고 있다. Denzel Washington 이 맡은 이역은 – 개인적으로는 Jamie Foxx가 이 역을 맡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 영화 ‘대부’의 Vito Corleone와 같은 일가를 이루고 싶었던 야심찬 인물이었다.

죽은 보스의 구역을 물려받은 Frank 가 채택한 경영(?)방식은 바로 중간상을 배제한 직거래를 통한 비용절감이었다. 그는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시절, 베트남에서 생산되던 마약을 중간상이 아닌 군인들을(!) 이용하는 획기적인 방법을 통해 경쟁력을 확보한 것이다. 당시 막 골목길을 차지하기 시작한 할인점이나 양판점에서 채택한 소매업의 구매파워를 마약거래에 이용했다는 점에서 그는 어둠의 경영자라 할 수 있었다.

한편으로 결코 화려한 옷차림이나 과시적인 거드름으로 자신을 내세우지 않음으로써 수사당국으로부터는 철저하게 미지의 인물이었다. 이것은 또 하나의 경영학이었다. 적이나 경쟁자에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그렇지 않을 경우 발생되는 기회비용을 최소화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는 한 권투시합장에서 실수로 화려한 모피 차림으로 나타나 그를 뒤쫓는 Richie Roberts(Russell Crowe) 라는 강직한 형사와 그에게 돈을 뜯어내려는 더러운 마약수사대에게 동시에 존재를 노출시키고 만다. Richie Roberts의 끈질긴 수사 끝에 그와 그의 가족들은 줄줄이 교도소로 향한다.

Frank는 수사당국 역시 썩을 대로 썩었다고 생각했기에 Richie 역시 매수하려 든다. 하지만 강직한 Richie는 – Russell Crowe 자체가 좀 그렇게 생겼다. 말 안 듣게… – 이에 굴하지 않았고 결국 Frank를 통해 경찰의 비리 커넥션까지 밝혀내는 개가를 올린다.

세월이 흘러 Richie는 변호사가 되었고 이번에는 Frank의 변호사가 되어 그의 형기를 줄여준다. 또 하나의 경영학이다. 사람은 어떻게 만날지 모르니 인간관계를 잘 가져라. 줄거리만 들어도 Frank Lucas의 인생이 무척이나 드라마틱했음을 잘 알 수 있다.

많은 감독들이 연출에 탐을 냈을 것이고 그 공은 명감독 Ridley Scott에게 돌아갔다. 당연히 영화는 일단 기본은 한다. 탄탄한 연기력을 가진 주연배우들, 끈적끈적한 시간과 공간, 흡인력 있는 에피소드 들이 나무랄 데가 없다.

문제는 짧은 러닝타임에 한 드라마틱한 인물의 생애를 담으려다보니 여러 디테일이 생략되었다는 점이다. Denzel Washington 의 연기는 여전히 듬직하지만 비천한 인물에서 거물로 성장하기까지의 드라마틱한 변화를 담기에는 솔직히 처음부터 너무 귀티가 났다. 그의 아내와의 사랑이랄지 Richie와의 타협과정도 지나치게 생략된 느낌이다. 만약 마음먹고 대부처럼 3부작으로 기획되었더라면 이러한 문제는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북한은 탐크루즈의 적?

비가 참 지저분하게 오네요. 이런 날은 그저 방구들에 몸을 파묻고 만화책 스무 권 쌓아놓고 노는 것이 최고죠. 여기저기 예전 발자국을 뒤지다보니 2002년에 썼던 글이 있어서 퍼다 나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정말 글발 후지네요.

요즘 매주 일요일 저녁이면 MBC스페셜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연속기획으로 “미국”에 대한 관찰기를 방영하고 있다. 찾아서 보진 않았어도 채널을 돌려 나오면 찬찬히 보는 편이었는데 의외로 내 자신이 미국에 대해 아는게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만큼 신선한 기획이 돋보였다. 미국을 “절대악”이나 “절대선” 어느 한쪽으로 몰지 않으면서도 우리와 다르다는 다양성의 원칙에 기초한 객관적 시각이 돋보이는 프로그램이다. 사실 절대악이라는 시각으로는 절대 다룰 수 없는 노릇이지만 그동안의 “선진국 컴플렉스”로 일관하던 구미선진국에 대한 겉핧기식 프로그램과는 다르다는 면에서 높이 사줄만하다.

특히 어제 방영했던 ‘헐리웃의 신화’는 영화라는 대중문화를 소재로 했다는 점에서 특히 흥미로웠는데 제작진이 파고들고자 했던 핵심주제는 헐리웃과 펜타곤과의 밀월관계이다. 카메라는 진주만 공습에서부터 시작된 미군부의 ‘프로패간다’로서의 영화의 역할에 주목하게 되었고 – 구소련은 건국부터 인지하고 있었던 – 이후 촬영협조를 미끼로 어떻게 헐리웃 영화의 의식형성에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이미 사상이 좀 삐딱한 사람이라면 의례 짐작할 수 있듯이 이 프로그램에서는 미국식 ‘배달의 기수’ 영화의 제작에 시나리오 작업부터 펜타곤이 깊이 관여하고 있음이 최근 공개된 국방부 문서나 현 펜타곤의 헐리웃 담당관의 인터뷰를 통해서 밝혀냈는데 특히나 흥미로운 사실은 우리가 추억의 80년대 영화로 기억하고 있는 Top Gun의 주적은 원래 ‘북한’이었다는 사실이다.

펜타곤은 70년대의 반전분위기 이후 악화일로를 걷고 있던 군에 대한 일반의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한 수단으로 영화 탑건을 선택하였고 희대의 섹시남 탐크루즈와 베를린의 멋진 테마곡으로 무장한 이 전형적인 ‘미국판 배달의 기수’는 그야말로 대히트를 기록하며 당초 펜타곤의 의도를 150% 달성하는 수확을 거두었다(다음해 사관학교 입학자가 전년 대비 5배 증가하였다 한다 -_-;). 그런데 시나리오 작업부터 밀착개입하였던 펜타곤은 시나리오 팀이 당시 화해 분위기에 있던 북한을 주적으로 설정한 사실을 알고 이를 지적 소련으로 바꾸었다는 사실이 탑건의 시나리오 작가와의 인터뷰에서 밝혀진 것이다.

참 재미있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한 사실이다. 우리가 아무런 생각없이 웃으며 즐기는 영화, 음악 등의 대중문화 – 특히나 구미의 대중문화 – 의 뒷면에 숨겨져 있는 그 문화적 오만함, 인본주의에 대한 무신경이 우리를 당황스럽게 하는 장면이다. Take My Breath Away의 뮤직비디오에 삽입된 우리의 주인공 탐크루즈의 멋진 기관총 난사에 의해 폭파된 전투기에 탑승한 조종사가 북한군일 수 있다는 사실은 ‘악의 축’이면서도 ‘대중문화의 축’인 미국의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굴욕감과 무력감을 느끼게 한다.

얼마전 새 007 시리즈에 북한군 장교로 출연을 제의받은 차인표의 행동은 그런 면에서 소극적인 저항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가 메이저 레코드사의 상업적 의도나 헐리웃 영화의 친미적인 프로파간다에 저항하면서 – 적어도 물들지 않으면서 – 서구 대중문화의 단맛만을 향유할 수 있을까?

그러한 시도는 영화계에서나 음악계에서 주로 ‘인디’라는 형용사가 붙은 생산자들에 의해 주도되기는 하였다. 영화에는 Michael Moore 와 같은 반골이 있고 음악계에서도 The Clash 등 소위 좌파 밴드들이 예술적 성취와 사상적 성취를 동시에 이룬 케이스가 있지만 이 역시도 소위 메인스트림이라는 거대한 괴물과 상대하기에는 너무 왜소한 다윗일 뿐이다. 또한 사실 나 자신도 매사에 그렇게 심각하게 문화를 즐기고 싶은 것도 아니다. 다만 일상을 자연스럽고 꾸밈없이, 그러면서도 “정치적으로 올바른(!)” 그런 영화와 음악을 즐기고 싶을 따름이다.

너무 거대한 소망일까?

결국은 ‘미국만세’, ‘자본주의 만세’라는 자가당착식 지뢰를 피해 가는 소극적인 소비행태를 취할 수 밖에 없는게 나의 한계인듯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