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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틴틴 : 유니콘호의 비밀’ 리뷰

사실 스티븐 스필버그와 피터 잭슨이라는 두 걸출한 이야기꾼이 에르제 원작의 ‘땡땡의 모험’을 영화화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기대 반 우려 반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두 거장의 그 동안의 영화 만드는 솜씨로 보면 ‘땡땡의 모험’을 영화화하는데 있어 가장 적임자이긴 하지만(특히 피터 잭슨), 유럽대륙 내에서야 – 특히 불어권 – 국민적 캐릭터에 가까울 정도로 숭앙받는 존재인, 이 유럽적인 캐릭터가 할리우드에 입성하게 되면 어떠한 캐릭터로 바뀔 것인가에 대한 우려도 있었기 때문이다.

극장에서 이 영화를 감상한 결과, 처음의 예상이 어느 정도 맞아떨어졌다. 모션캡처를 활용한 현란한 그래픽, 3D를 통해 극대화한 모험의 세계, 땡땡 시리즈의 재밌는 에피소드를 조합한 무리 없는 이야기 진행, 거기에 나름의 에피소드를 새로이 넣어 엮어낸 솜씨(예로 하독 선장과 사카린의 크레인 싸움) 등은 ‘과연 스필버그구나’하는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영화의 미덕이었다. 다만 아쉬운 점은 한정된 시간 안에 땡땡을 관객에게 처음 소개하는 과정에서의 몇몇 무리수가 보인다는 점이었다.

가장 아쉬운 점은 사실 땡땡이 과연 주연이 맞는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그의 비중이 약했다는 점이다. 몇몇 감상에서는 ‘이 영화가 스노위의 모험이냐?’ 할 정도로 땡땡 보다는 그의 애견 스노위의 역할이 두드러져 보인 것이 사실이다. 극의 내러티브에 있어서도 – 이건 에피소드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 불가피한 것이기도 하겠지만 – 결국 하독 선장의 가족사가 두드러졌고, 자연히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하독 선장과 사카린의 크레인 싸움이 되어버렸다. 땡땡은 조력자의 위치에 머문 셈이다.


영화에서 최고의 활약을 펼친 스노위

에피소드에 대해 이야기해보자면, 스필버그가 ‘유니콘의 비밀’과 ‘레드 라캄의 보물’을 원작으로 고른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스필버그가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에서부터 추구해오던 것은 보물을 찾아나서는 모험이라는 소재였다. 위 두 에피소드는 땡땡의 다른 어떤 에피소드보다 이런 스필버그의 구미에 잘 맞는 에피소드다. 거기에다 ‘해적’까지 등장하니 더할 나위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식민지 중국에서의 땡땡의 항일투쟁을 소재로 한 ‘블루로터스’를 고르지는 않았을 것 같다.

이 과정에서 스필버그와 땡땡의 만남이 어떻게 가능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스필버그의 최대 히트작 중 하나인 ‘인디아나 존스’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소개 팸플릿에서는 조지 루카스의 입을 빌어 인디아나 존스의 오리지널 모델을 땡땡으로 삼았다는 인용구가 나온다. 우리 매체도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땡땡과 인디와의 관계’라는 외신을 보면 약간 이야기가 다르다. 즉, 애초 스필버그는 땡땡의 존재를 몰랐지만 뒤늦게 유사성을 알게 되어 영화화를 마음먹었다는 것이다.

The connection between Tintin and Indy: When Spielberg was reading French reviews of Raiders, he saw that a lot of them kept mentioning something called Tintin and the parallels between the two. Spielberg who had never read the comics, immediately sought out Remi’s work and after reading through, immediately wanted to adapt Tintin to the big screen. Tintin, he asserted has been “30 years in development.”
땡땡과 인디와의 관계 : 스필버그가 레이더스의 프랑스 쪽 리뷰를 읽었을 때, 그들 중 상당수가 땡땡이라 부르는 어떤 것을 언급하고 둘 간의 유사성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보았다. 스필버그는 그 코믹북을 읽은 적이 전혀 없었기에, 즉시 레미의 작품들을 구해보았고, 그것을 읽은 후에 땡땡을 즉시 빅스크린에 적용하고 싶어졌다. 그가 확신하길 땡땡은 “30년간 개발 중이었던 것이다.”[RAIDERS OF THE LOST ARK Los Angeles Screening Recap With Steven Spielberg and Harrison Ford; Updates on INDY 5 and More]

스필버그가 ‘땡땡을 알고 인디를 만들었는가 아니면 인디를 만들고 땡땡을 발견했는가?’라는 호사가적 호기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지만, 어쨌든 중요한 사실은 애초에 스필버그가 땡땡에게서 원한 것은 ‘어린 인디’였다는 점이다. 그러한 점에서 땡땡은 ‘블루로터스’나 ‘땡땡과 피카로스’에서처럼 정치적이어서도 안 되고, ‘아메리카에서의 땡땡’처럼 느와르 적이어서도 안 되고, 더욱이 ‘콩고에서의 땡땡’처럼 인종주의적이어서도 안 되는 인물이어야 했다. 남은 선택은 해적의 보물을 찾아 나선 ‘어린 인디’였다.

요컨대 이번 작품이 땡땡을 잘 아는 유럽인들에게는 향수를 자극하는 작품으로 흥행요소가 되었겠지만, 땡땡을 잘 모르는 이들에게는 할리우드에 처음 입성한 유럽 출신 배우가 인디아나 존스를 흉내 낸다는 느낌을 받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점이 스물 세편에 달하는 에피소드를 관통하는 그의 캐릭터에 익숙지 않은 대다수에게 어필할 수 있는 편리한 방법으로, 할리우드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며 땡땡을 불어권의 캐릭터가 아닌 영국 캐릭터로 만든 불가피한 타협으로 이어진 셈이다.

p.s. Tintin을 어떻게 부를 것이냐 하는 문제도 땡땡의 팬들에게 곧잘 화제가 되곤 하는데, 현지에서는 ‘땅땅’에 가깝게 발음한다. 영어로는 이번처럼 당연히 ‘틴틴’이라고 하고, 우리나라 팬들 사이에서는 ‘땡땡’이라고 발음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

‘창작의 고통’에 대한 단상

개인적으로 한때 소설이랍시고 끼적거리기도 하고 이 블로그에 이런 저런 글을 쓰는 것을 창작이라고 쳐준다면야, 나도 일종의 창작활동을 하는 셈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글을 쓰는 것을 직업으로 삼지 않은 이유는 무엇보다 재능이 없기 때문이지만, 그 이유 말고도 또 하나 하찮은 이유를 하나 대자면 창작의 고통에 대한 공포감도 있었을 것이다.

앉은 자리에서 즉흥곡을 척척 연주해대던 모짜르트같은 희대의 천재가 아닌 이상(그러한 에피소드도 후대에 의해 과장되었을 개연성이 좀 있다고 여겨지지만), 대개의 예술가들은 하늘 아래 없던 그 무언가를 끄집어내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고, 이러한 노력은 웬만한 사람이라면 견디기 어려울 큰 고통이었을 것이다.

예술적 성공은 금전적 보상을 안겨준다. 그러나 이건 또한 굶주린 유령이다. 코가 버튼 모양이었던 소년 기자 땡땡에 관한 만화로 부를 쌓은 벨기에 예술가 조르쥬 레미(Georges Remi)는 1951년 같은 이름으로 주간지에 두 개의 땡땡 란을 창작하는 일의 “진을 빼는 스케줄”을 자세히 설명한 편지를 한 장 썼다. “내 말을 믿게. 예술가 자신 말고는 누구도 그림 이야기를 위해 소요되는 수많은 작업, 리서치, 독창성 등을 상상할 수 없다네.” 에르제(Hergé)란 필명으로 더 널리 알려진 레미의 말이다. “인쇄기가 입을 크게 벌리고 인쇄할 종이들을 갈망하면서 저쪽에 앉아 있지.”[Tintin steps off the page]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땡땡의 모험”의 작가 에르제에 관한 일화다. 사실 그가 작품을 만들기 위해 기했던 완벽주의와 이로 인해 받았던 압박감은, 그의 팬들에게는 꽤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그의 만화는 한 컷 한 컷이 집요하다 싶을 정도로 엄밀한 역사적 고증을 통한 세밀한 묘사로 채워져 있다. 에르제는 스스로를 이런 집요함에 몰아넣은 것이다.


자신의 작업장에서 자신의 작업을 채찍질하는 것으로 작가가 묘사한 땡땡
 

하지만 결국 그런 고집스러운 집요함이 없었더라면 땡땡의 모험은 단지 1930년대 소년잡지에 연재되었던 반공(反共)적이고 인종주의적인 작품으로만 남았을 것이다. 그는 세밀함에 대한 고집뿐만 아니라 작품의 주제의식에 대한 고집도 남달라 결국 스스로의 역사관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땡땡을 단순한 아동만화 캐릭터 이상의 것으로 승화시킨다.

땡땡이 단순한 소년만화로 취급되지 않는 이유도 이런 사유다. 초기의 엉성한 주제의식과 어두운 가족사가 내포된 캐릭터 설정 등이 작품의 한계였다면, 에르제 스스로의 엄청난 노력의 결과인 후기의 작품들은 단순한 모험만화가 아니라 하나의 일관된 세계관을 반영하는 걸작으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비록 그것이 그에게는 고통이었지만 말이다.

다시 창작의 고통에 대해 말해보자. 블로깅도 이런저런 자잘한 노력들이 필요하다. 글줄기도 잡아야 하고 관련근거도 찾아봐야 하고 문체도 신경 써야 한다. 그런 번거로운 일을 왜 하냐하고 생각해보면 결국 그런 창작의 고통에 수반되는 창작의 기쁨과 자기성장 때문이 아닐까 싶다. 에르제가 누린 창작의 기쁨의 크기는 가늠하기 어렵지만 말이다.

Magic Highway U.S.A

미래의 고속도로에 관한 재미있는 애니메이션을 소개한다. 디즈니가 1958년 제작한 “Magic Highway U.S.A”라는 제목의 에피소드다. 예쁜 그림체에 색감이 귀엽고 맘에 든다. 상상력을 동원한 여러 미래의 도로나 그 부대시설도 그럴싸하다. 다만 그 중에 별로 실현된 것이 없다는 점이 아쉽기는(?) 하지만 또 그런 점이 ‘미래주의(Futurism)’의 매력이니까. 여하튼 내내 보면서 드는 또 하나의 생각은 ‘미국은 도로에서조차 그들만의 독특한 개인주의 라이프스타일을 끝까지 고집하는구나’ 하는 것이었다. 퍼블릭 운송수단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기껏해야 패밀리카가 등장하지만 그마저도 칸 분리되어 따로 운송되는 모습을 보니 정말 기가 질릴 정도다. :) 어쨌든 가벼운 맘으로 이런 상상력 중 앞으로 어떤 것이 실현될까 하고 추측해보시며 즐기시길.

아키라, AKIRA(1987)

원작자 오토모가츠히로가 작품의 독립성을 위하여 별도의 위원회(일명 “아키라 위원회”)까지 구성하여 제작한 이 영화는 원작의 인기에 못 미치는 일본의 흥행성적에도 불구하고 서구에서는 저패니메이션이라는 신천지를 소개한 컬트 영상이 되어 일본으로 금의환향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장장 12권에 달하는 장편만화 원작을 120여 분에 담아낸 탓에 영화는 마치 만화속의 인물들에게 “시간이 없으니 어서들 부지런히 연기해주세요”라고 몰아붙이는 것 같은 느낌이다. 요즘같아서는 당연히 ‘반지의 전쟁’처럼 3부작 쯤으로 늘였겠지.

 아키라라는 상상초월의 절대존재와 비슷한 과정을 통해 탄생한 초능력자들의 대결을 중심으로 카네다와 K 의 모험과 로맨스가 3차 대전이후 재건된 네오도쿄에서 펼쳐진다. 냉정하다 할 정도로 사실적이고 웅장한 화면 – 네오도쿄의 건물들은 만화에서보다 영화에서 더 미래주의적으로 그려져 있다 – 이 이전의 저패니메이션과 차별화되어 내용에 걸맞는 형식미를 뽐내고 있는 이 작품에서 아쉬운 점은 앞서 말했듯이 짧은 러닝타임 – 원작에 비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 으로 인해 사건의 설명이 부족하고 이로 인해 각 캐릭터간의 갈등과 대립이 생뚱맞은 측면이 적지 않다는 점이다. 데츠오와 다른 초능력자들 간의 대립의 이유, 카네다가 데츠오를 죽이려는 이유, 부패한 정치인 네즈와 혁명가 류가 함께 일한 이유 등이 영화에서는 모호하고 – 나같이 머리나쁜 사람은 원작 만화를 읽어야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능한 – 결정적으로 원작에서 19호로 불리며 극의 큰 축을 담당했던 신흥종교의 교주는 어이없게도 사이비 교리를 외치다가 데츠오가 파괴한 다리에 떨어져 죽는 식의 엑스트라로 전락하고 만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러한 아쉬운 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키라는 저패니메이션을 뛰어넘어 사이버펑크라는 SF의 하위장르에서 커다란 족적을 남긴 걸작임에는 틀림없다. 원작자의 과학문명에 대한 비관적 입장이 형상화된 도시는 하나의 거대한 디스토피아였고 이는 당시 몇몇 걸출한 SF 등과 함께 훗날의 SF 의 경향을 주도하는 데에 한 몫 담당하였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 작품은 문명비판의 메시지와 함께 추축국이었던 일본의 패배와 전후 고속성장에서 나타나는 국민의 피로감을 나타낸 작품이기도 하다. 좌익이 되었건 우익이 되었건 일본의 전후세대는 빠르게 변화하는 문명 속에서 가치관의 혼란과 정부에 대한 불신을 느꼈고 그러한 혼란은 좌우익 모두에게 무정부주의, 염세주의적 가치관을 심어주었다. 그리고 이 작품은 그러한 열망을 네오도쿄의 폭파와 미지의 생명 탄생이라는 사건을 통해 상징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사우스파크, 앞으로 공짜로 본다

귀여운 아그들의 대화의 반절 이상이 쌍시옷 들어가는 욕으로 채워지는 만화 남쪽공원(사우스파크)을 아시는지? 속된 말로 정말 골 때리는 이 동네에서 끊임없이 사고를 쳐대는 주인공들을 보고 있자면 심슨 가족은 정말 교양과 품위 넘치는 이들이다. 심슨 가족은 메인스트림이다. 암튼 한때 어둠의 경로를 통해 신나게 다운받아 보던 애청프로였다.

그 사우스파크가 어느덧 12번째 시즌을 맞이했다고 한다. 그동안 잊고 있었는데 감회가 새롭다. 한편 새로운 시즌을 맞이하여 이 시리즈의 창조자 중 한 명인 Matt Stone 아저씨가 최근 팬들에게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고 한다. 다음은 그가 가진 Boing Boing 과의 인터뷰다.

“모든 사우스파크 에피소트와 수백만 개의 클립이 몇 년 동안  유투브나 빗토렌토를 통해 온라인에서 떠돌아 다녔었다. (…) 우리는 언제나 더 많은 곳의 더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작은 쇼를 본다는 사실을 즐겨왔다. 새 웹사이트가 이제 사람들이 사우스파크를 보고 나누는 것을 더 쉽게 만들 것이다.
궁극적으로 전 세계 어디서든 모든 에피소드와 클립을 (공짜로:역자주) 볼 수 있다. 코미디센트럴이 다른 케이블회사와 지역과 맺은 계약 때문에 당장은 그렇게는 못하고 있다(모든 에피소드를 공개 못 하고 있다는 의미로 거의 대부분의 에피소드는 이미 공개되었다:역자주). 그러나 아마도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우리의 쇼를 언제나 불법적으로 다운받아야 한다는 것에 질려버렸다.(이 부분 대박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합법적 대안을 제시한 것이다.”

“Every South Park episode and billions of clips have been online for years on YouTube or BitTorrent (…) we’ve always loved the fact that more people in more places could see our little show. The new website just makes it easier for people to see and share South Park.
Eventually every episode and clip will be available everywhere in the world. There is a tangle of contracts that Comedy Central has with different cable companies and territories that are preventing us from that right now. But hopefully it won’t be long.
Basically, we just got really sick of having to download our own show illegally all the time. So we gave ourselves a legal alternative.”

오~~ 오빠 멋쟁이~~!!

나는 자신의 창작품에 대한 정당한 권리(가장 근본적으로는 금전적 권리겠지만)를 주장하는 이를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자신의 창작품을 이렇게 흔쾌히 남들과 나누는 사람에게는 그 이상의 칭송이 있어야 하는 법이라고 생각한다. 이래서 세상이 좀 더 살만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앞으로 적어도 사우스파크만큼은 고화질의 영상을 마음의 짐 덜어내고 보게 되었으니 좋지 아니한가. :)

They Killed Kenny but They Saved Their Fans~

니모를 찾아서, 그리고 자유를 찾아서

‘니모를 찾아서(Finding Nemo)’는 디즈니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잘 표현한 전형적인 사례다. 무엇에도 우선하는 가족의 가치, 그럼에도 세상 밖으로 나아가려는 후손들에 대한 너그러운 배려가 이 영화의 핵심적인 주제다. 등장인물(?)들은 이미 알고 있다시피 말린(Marlin)과 니모(Nemo) 부자로 ‘흰동가리(clownfish)’ 종으로 알려진 (의인화된) 물고기들이고 나머지 조연들 역시 바다 속에 서식하는 (역시 의인화된) 상어, 문어, 해마, 거북이 등이다.

사건은 홀아비 말린의 과보호 속에서 자란 니모가 학교에 입학하면서 발생한다. 입학 첫날 아버지에게 반항하던 니모는 잠수부에게 잡혀 시드니의 한 치과 수족관에 갇히게 되고, 말린은 기억력이 낙제점인 도리(Dory)라는 수다스러운 물고기와 함께 니모를 찾아 나선다. 니모는 수족관에서 좋은 친구들을 만나지만 아버지와 바다에 대한 그리움으로 함께 탈출을 꿈꾼다. 말린은 죽을 고비를 몇 번 당하는 등 힘든 여정을 이어가지만 거북이, 펠리칸 등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아들을 만나는 데 성공한다.

앞서도 이야기하였다시피 이 영화가 시종일관 전달하는 메시지는 가족의 중요성이다. 그리고 또한 개인의 발전은 가족 안에서의 사랑과 배려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실도 강조하고 있다.(주1) 그러나 개인적으로 보다 흥미로운 점은 다른 곳에 있었다. 바로 수족관에 갇힌 니모를 비롯한 물고기들의 탈출기에서 볼 수 있는 ‘자유에의 대한 갈망’이다.

영화에서는 물고기들이 탈출하고자 하는 욕망, 즉 자유에 대한 갈망을 당연히 추구하여야 할 가치로 받아들이고 있다. 니모로서는, 그리고 또 한 마리의 바다 출신(?)의 물고기 길(Gil)에게는 당연하다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니모는 아버지와 생이별을 하였고 길은 바다의 존재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머지 물고기들은 과연 무엇을 위해 바다로 탈출하여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던져볼 수도 있을 텐데 영화는 이에 대해 설명하지 않고 있다.

누군가가 태어나기를 감옥에서 태어났다면 그를 감옥 바깥으로 보내는 것은 그에게 자유를 주는 것인가 아니면 살벌한 바깥세계로 내모는 것인가. 과연 니모나 길을 제외한 다른 물고기들은 ‘자유’라는 피상적인 – 또한 실체에 접근하였는지도 모르는 – 가치를 위해 안정적으로 제공되는 먹이와 먹이사슬로부터의 안전함을 희생할 필요가 있는가.

우리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또 다른 수족관, 또는 감옥이 아니라는 사실을 무엇을 통해 확신할 수 있는가. 내 자신이 감옥에서 태어난 사람일 수도 있다. 사실은 이 세계도 또 하나의 감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 당신을 갑갑하게 하는가. 당신의 자유는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면서 속박 당하게 되는가.

이러한 ‘자유와 세계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주제로 한 영화가 꽤 있다. 대표적인 영화로 ‘The Matrix’, ‘The Truman Show’ 등을 들 수 있다. 두 영화 모두 주인공들은 그들 자신이 갇혀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 자신들은 사실 갇혀있다는 진실에 접근하게 되고 갈등은 증폭된다. 하지만 그게 어때서. 감옥 속에서 행복(?)했다면, 진실을 조금만 외면하면 계속 행복할 것인데(주2) 꼭 쇼생크 탈출의 앤디처럼 필사적으로 탈출할 이유가 있는가. 그럴 정도로 ‘자유에의 갈망’은 절대 물러설 수 없는 지고지순한 가치인가.

물론 이 영화는 지금 이렇게 딴죽을 걸고 있는 그러한 주제에 대하여 어떠한 문제제기도 하지 않는다. 자유의지는 당연한 것이고 수족관은 파괴되어야 한다. 수족관은 그렇듯 자유를 속박하는 설정으로만 작용할 뿐이다. 수족관에서 태어난 물고기가 바다를 만났을 경우 혼란스러워질 세계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삐딱한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수족관과 바다의 상징성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탈출을 꿈꾸는 길에게 바다가 또 하나의 수족관이면 어쩔 테냐고 묻고 싶었다.

어쨌든 니모는 탈출에 성공하고 아버지 말린을 만났고 아버지의 격려 속에 좀더 성숙한 물고기로 성장하였다. 하지만 수족관에 있을 때보다 더 많은 위험에 노출될 것이고 먹이를 찾기 위해 더 필사적인 노력을 하여야 할 것이다.(주3) 그래서 나는 니모에게 묻고 싶다.

“수족관에 살 때보다 더 행복하니?”

p.s. 주연을 맡은 흰동가리는 성전환이 자연스럽게 되는 생물로 유명하다고 한다. 헉~ 더 자세한 정보는 여기를….

(주1) 잘 알고 있다시피 이러한 메시지는 디즈니 영화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메인스트림 헐리웃 영화가 공통적으로 전하는 메시지다

(주2) 사실 The Matrix 2편, 3편에 나오는 실제 세계를 보면 왜 그리 악착같이 가상의 세계를 탈출하려 했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주3) 아 물론 영화는 “그 뒤로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끝을 맺는다

왕립우주군 [オネアミスの翼 王立宇宙軍]


지구와 비슷한 조건을 지닌 우주 어딘가의 상상의 별 오네아미스에서 우주탐험의 꿈을 키우며 살아가는 시로츠크라다트라는 젊은이와 그 주변사람들의 모험을 그린 작품. 일본 애니메이션 계의 큰 축을 담당하는 제작사 가이낙스의 초창기 작품으로 감독·원작·각본은 야마가 히로유키[山賀博之], 제작은 히로아키 이노우에[井上博明]·오카다 토시오·스에요시 히로히코[末吉博彦], 음악은 류이치 사가모토[坂本龍一]가 맡았다.

우주여행을 꿈꾼다는 소재 면에서 필립카우푸만 감독의 ‘Right Stuff’를 연상시키지만 그 전개방식은 사뭇 다르다. 순전히 우주탐험을 위해 설립된 우주군에 소속된 시로츠크는 나태한 생활에 찌든 무기력한 젊은이였지만 삶에 대한 태도가 무척 진지하고 독실한 종교인인 레이쿠니라는 소녀를 만나게 되면서 대오각성하고 최초의 우주비행사에 지원하게 되면서 이야기는 본 궤도에 접어든다. 한편 이웃국가들은 우주군이 제작하고 있는 로켓을 탈취하려 전쟁을 벌이게 되고 로켓 발사지역이 전쟁접경지역에 위치해 있는지라 로켓 발사를 포기하려 하지만 시로츠크의 다부진 결의에 모두 감화되어 마침내 로켓을 우주로 쏘아 올리는데 성공한다.

이 영화의 하나의 큰 상징은 불이다. 이 행성의 종교의 성전(聖典)에는 타오라는 중간자가 – 마치 프로메테우스처럼 – 신으로부터 불을 훔쳐오지만 그로 인해 큰 고통을 겪게 된다. 불은 파괴와 창조의 이중적인 이미지를 지니고 있고 불을 뿜는 로켓은 바로 그 불이 형상화된 물건이다. 영화 속에서 평화주의자들은 파괴적인 로켓의 개발을 중지하고 그 돈으로 다리를 지으라고 데모를 하는데 그것은 바로 불의 파괴적인 이미지를 두려워함에서 기인한 행동이었다. 시로츠크는 한편으로 그러한 주장에 공감하면서도 결국 불굴의 의지를 통해 불을 새로운 창조로 승화시킨다. 그런 한편으로 인간의 영역이 우주로 확장되었음에 인간이 우주마저 오염시킬 것이라는 안타까움에 신께 기도를 올린다. 인류의 역사에 있어 과학발전이 가져온 – 불과 마찬가지로 – 파괴와 창조의 모순된 모습을, 그리고 그 모순이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순기능적인 부분으로 전환되어야 함을 암시하고 있다.

지구와는 다른 별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의상에서부터 언어, 비행기, 그리고 생활양식에 이르기까지 새로이 하나의 다른 문화를 창조해냈는데 그 디테일에 기가 질릴 정도다. 또한 순수한 셸애니메이션으로 그 디테일을 묘사함에 있어서도 일종의 지독한 장인정신을 엿볼 수 있다. 전설적인 일본의 테크노 밴드였던 Yellow Magic Orchestra 의 프론트맨이었던 류이치 사카모토의 미래주의적인 음악이 귀에 멋지게 휘감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