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ursuit of Happyness(2006)

이 영화는 여러 면에서 ‘Erin Brockovich’의 흑인 남성 버전이라 할만하다. 어린 자식들을 부양해야 하지만 배움도 없고 재주도 없었던 에린이 각고의 노력 끝에 마침내 성공하게 되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그 영화처럼 이 영화 역시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던 Chris Gardner 라는 흑인 남성이 주식중개인으로 성공한다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이기 때문이다.

80년대 초 샌프란시스코에서 휴대용 엑스레이 촬영기를 판매하며 생계를 꾸려가던 Chris Gardner(Will Smith). 그에게는 사랑하는 아내와 사내아이가 있었지만 쪼그라들어만 가는 생계로 인해 아내와의 갈등은 심해지고 마침내 아내는 그의 곁을 떠나고 만다. 어릴 적부터 수학적 재능이 있었던 Chris 는 어느 날 주식중개인의 인턴십에 도전하지만 정식사원으로 채용되기 위해서는 수많은 난관이 버티고 있었고 그나마 인턴 기간에는 보수마저 없었다.

유일한 호구책인 엑스레이 촬영기는 이런 저런 사람들에게 도둑맞고 되찾는 과정을 되풀이한다. 급기야 세무당국에게 밀린 세금을 차압당하여 무일푼이 된 그는 여관에서도 쫓겨나 아이와 함께 지하철역 화장실에서 몸을 누이고는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어쨌든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져가던 그의 인생은 마침내 인턴기간 동안 보여준 그의 능력에 대해 회사가 정식채용으로 보상함으로써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린다.

이 영화에서는 재미있는 두 개의 물건이 등장한다. 하나는 앞서 말한 휴대용 엑스레이 촬영기이고 또 하나는 80년대를 풍미했던 이상한 정육면체 장난감 루빅스큐브이다. 엑스레이 촬영기는 Chris 와 그의 가족에게 있어 애증의 상징이다. 그 뛰어난 성능에 혹한 Chris 가 판매를 위해 전 재산을 쏟아 구입했을 당시 그것은 가족에게 희망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의사들에게 일종의 사치품으로 간주되었던 그 물건의 부진한 판매는 가족에게 갈등과 고통의 상징으로 돌변한다. 그리고 마침내 아내가 떠나고 파산한 Chris 에게 그것은 마지막 삶의 희망이 된다. 부피가 큰 재봉틀과 같은 외양을 가진 이 물건을 항상 들고 다니던 Chris 의 모습에서 우리는 애정과 증오가 반복되는, 그러면서도 차마 떨쳐 내버리지 못하는 우리 삶의 그 어떤 고단한 일상을 발견하게 된다.

반면 일종의 고도의 수학적 지식이 요구되는 장난감이었던 루빅스큐브는 단 한번의 등장으로 Chris 에게 천재일우의 기회를 제공하는 물건이 되었다. Chris 가 끈질기게 매달렸던 증권회사의 유력한 임원 Jay Twistle 은 Chris 와 함께 탄 택시 안에서 루빅스큐브를 맞추려고 노력한다. 이것을 본 Chris 가 혼신의 힘을 다해 루빅스큐브를 맞추자 Twistle 은 이 고졸 학력의 흑인을 남다른 눈빛으로 바라보고 마침내 인턴십의 기회를 준다.

그가 행복추구를 위해 돈을 쏟아부은 촬영기는 짐이 되고, 루빅스큐브는 Chris 에게 단순한 장난감이 아닌 자신의 능력을 검증하는 매개체로 작용한 것이다. 고단한 일상에서도 토마스 제퍼슨이 천명한 ‘행복추구권’의 행사를 위해 노력했던 그의 구세주는 국가의 공적 부조나 그의 아내, 그리고 촬영기가 아닌 루빅스큐브였다는 사실이 인생의 아이러니로 다가온다.

많은 사람들이 휴대용 엑스레이 촬영기와 같은 어리석은 선택을 통해 행복을 추구하지만 실패하고 만다. 그러나 훨씬 적은 사람들이 루빅스큐브와 같은 기회를 잡게 된다. 인생의 사닥다리에 매달린 수많은 사람들이 Chris 의 루빅스큐브와 같은 기회를 잡게 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한 개인에게는 해피엔딩이지만 현실적으로 다수의 빈자들에게는 일종의 동화 같은 무용담일 뿐이다.

가난한 미혼모에서 해리포터의 작가로 일약 억만장자가 된 조앤 롤링이나 수학적 재능을 바탕으로 인생역전을 이루어 낸 Chris 와 같은 이들이 아니더라도 누구에게나 행복추구권은 있는 것이고 이는 사회의 조화로운 발전을 통해 이루어져야 하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다수의 보통사람들은 그 와중에도 자신은 ‘동화 같은 무용담’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하곤 한다.

p.s. Chris 의 아들 역을 맡은 꼬마는 다름 아닌 Will Smith 의 아들 Jaden Smith 라고 한다. 오디션에 뽑히기 전까지 Will Smith 의 아들임을 밝히지 않았다고 하니 연기재능은 역시 어디로 새지 않았던 모양이다. 영화의 말미에 한 흑인 남성이 Chris 부자의 곁을 지나가는데 그가 바로 실제 인물 Chris Gardner 라고 한다.

미쉘 공드리

요즘 감상하는 작품 중 실망감을 안겨주지 않는 영화감독이 있다면 단연 미쉘 공드리 Michel Gondry 다. 여태껏 본 그의 영화는 세 개. 감상시점 순서로는 ‘수면의 과학(2005)’, ‘이터널 선샤인(2004)’, ‘비 카인드 리와인드(2007)’ 인데 각각의 작품이 나름의 개성을 품고 있으면서도 ‘공드리 표 영화’라는 스타일이 일관되게 흐르고 있다는 점이 매력이다.

비단 나뿐 아니라 많은 이들이 그의 작품을 보면서 레오 까라, 무라카미 하루키, 왕자웨이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감성을 느꼈을 것이다. 그런 한편으로 그의 작품에서 더욱 도드라지는 그만의 특색은 우리가 소위 MTV식 편집이라 이름붙인, 어떤 의미에서는 휘발성의 자극이 강하다고 비판하는 그 지점의 편집과 연출이 공드리 식의 현실과 환상을 오가는 이야기 전개에 기가 막히게 어울린다는 점이다.

소재 면에서는 공히 남녀 간의 사랑을 다룬 ‘수면의 과학’, ‘이터널 선샤인’ 에 지쳐갈 때쯤, 마을주민이 참여한 영화제작을 통해 낡은 건물을 보존한다는 줄거리의 ‘비 카인드 리와인드’를 감상하게 되어 공드리에 대한 신선감을 이어갈 수 있었다. 가장 감탄을 하면서 본 영화는 ‘이터널 선샤인’. 과거와 현재가 정신없이 왔다 갔다 하므로 영화 보다가 헷갈릴 수도 있다. 글을 적다보니 레오 까라의 영화가 보고 싶어진다.

꽁치의 맛 (秋刀魚の味, 1962)

그 유명한 오스 야스지로의 영화를 본 건 이 작품이 유일하다. 죽기 전에 꼭 봐야 되는 영화란 없는 법이니 “누구누구의 영화를 여태 못 봤네” 라고 새삼 떠들어댈 필요는 없으나 이른바 그의 최고 걸작이라는 ‘동경이야기’를 건너뛰고 ‘꽁치의 맛’을 본 것이니 만큼, 그 감상은 그 감독에 대해 종합적이기보다는 ‘꽁치’ 한 마리만의 맛에 대한 감상에 그칠 것이기 때문에 굳이 언급해둔다.

이 영화의 작품은 마치 영어 제목처럼 가을 오후 어느 평범한 일본인 가정에 몰래 들어가 그들의 일상을 훔쳐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그것은 극적갈등 없이 – 그 갈등이랬자 시집가기 싫다는 딸의 푸념인데 보통 영화들의 갈등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다 – 잔잔한 일상을 편하게 그려내고 있어서 그렇기도 하거니와 그 유명한 ‘다다미샷’ 이 시종일관 사람머리보다 낮은 위치에서 미동도 않은 채 풍경을 잡아내고 있기에 더욱 그런 느낌이 든다. 남의 집 복도 한편에서 몰래 방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은 그런 느낌말이다.

그런데 사실 이야기는 지극히 현실적인 듯하면서도 지극히 비현실적이다. 혼기가 찬 딸과 딸을 시집보내려는 아버지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에피소드는 우리 일상에서 흔히 벌어질법한 소재들이기는 하나 그 사건들안에서 실제 일어날법한 갈등이 극중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아버지는 너무 인자하고 딸은 너무 야무지다. 심지어 딸은 마음에 담아두고 있던 미우라가 다른 애인이 있음을 알자 미련 없이 포기해버리고 만다. 마치 예전에 방영되었던 TV드라마 ‘보통사람들’을 보고 있는 느낌이다. 그 많은 대가족이 아무런 갈등도 없이 사이좋게 사는 그런 상황설정이었는데 절대 보통사람들의 가족이 아니었다.

영화 말미에 딸을 시집보낸 아버지는 술에 취한 채 집에 들어와 외로움을 되뇐다. 그리고는 나지막하게 부르는 노래가 있는데 바로 옛 전우를 만난 ‘Torys 빠’에서 들은 군가. 자칫하면 아슬아슬하게 전범으로까지 몰릴 수 있는 함장의 위치까지 올라갔었던 ‘인자한’ 아버지는 결국 자신의 전성기였던 그 시절이 덧없이 흘러갔음에 눈물짓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인지상정인 것이다. 폭력의 역사마저 한 개인의 추억으로 남게 되는 나약하고도 모순된 감정. 영화는 물론 그러한 편리한 감정치환이 어떻게 자리매김해야하는지에 대한 답은 제시하지 않는다. 그저 옛 전우의 입을 통해 미국이 이기는 통에 요즘 젊은 애들이 미국 흉내를 낸다고 불평할 뿐이다. 패전의 역사적 교훈은 아들딸에게 대물림되지 않고 늙은이들의 푸념이나 추억으로만 남을 뿐이다.

한 세대가 가고 새로운 세대가 혼인을 맺는 전후 과도기를 잔잔히 그린 이 작품이 단순히 한 가족의 아름다운 일상을 그린 드라마가 아니라 일본역사의 세대간 단절감과 새로운 도약에 관한 은유라고 간주한다면 – 완전히 그런 느낌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 군가와 옛 전우의 배치는 다분히 의도적이기 때문이다 -  적어도 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옛 세대들은 너무 무책임하다.

오만과 편견(Pride and Prejudice, 2005)

극중 인물 엘리자베스 베넷이야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자면 그리 새로울 것도 없는 캐릭터다. 안정적인 결혼생활이 가능하지만 안 끌리는 – 역시 무엇보다도 너무 못생겨서(?!) – 콜린스보다는 언젠가 자신을 확 잡아당겨줄 사랑할 남자와 함께 하고 싶다는 그녀. 로맨틱코미디에서 신물 나게 보아온 인물상이다. 하지만 이 캐릭터가 19세기 초반 여성작가가 쓴 소설에서 등장했다면 꽤나 심각히 생각해볼 문제이다. 빅토리아 여왕이 아직 태어나기도 전인 1813년 여류작가 제인오스틴이 발표한 이 작품은 이성관계의 연결고리를 지위나 재산으로 보기보다는 둘 사이의 감정으로 보았다는 점에서 당시로서는 매우 혁신적이었을 법한 발상이기 때문이다.

당시 중산층 이하의 영국여인에게 결혼이란 로맨스의 귀결이라기보다는 자신의 밥벌이인 동시에 가족부양의 주요한 수단 일만큼 절박한 일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당시에는 ‘한정상속’이라고 하여 여자에게는 상속권이 없었고 가장 가까운 남자친척 – 극중에서는 콜린스 – 에게 상속권이 있었다고 할 만큼 여성의 지위는 보잘 것이 없었기에 고소득의 직업군이 있을 리 없을 당시 여성들에게 결혼이외에 다른 대안이란 있을 수 없었다. 작가 스스로도 혼기가 차자 청혼을 받았으나 남자집안의 반대로 결혼이 무산되면서 평생을 친척집을 전전하며 살았다 하니 결국 엘리자베스는 사랑이라는 너무 위험한 베팅을 한 것이었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을 깔고 있는지라 극 초반 다섯 자매의 호들갑은 충분히 이해할법하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 자신들을 예쁘게 포장하여 무도회장이라는 시장(市場)에 내놓아 검증을 받아야 하는 입장이니 말이다. 결과적으로 무도회에서는 아름답고 우아한 맏딸 제인이 빙리의 뇌리에 꽂혔고 엘리자베스는 어디서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시큰둥하기만 한 달시와 어색한 첫 만남을 갖게 된다. 이후 진행되는 스토리는 그야말로 로맨틱코미디의 전형이라 할 만한 장르적 형식, 즉 스크루볼 코미디의 전형을 따르고 있다. 오만한 달시와 편견을 가지고 있는 엘리자베스. 주위에서도 다들 서로 싫어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그 두 사람이 조금씩 서로에게 다가가는 그 미묘한 긴장감, 그 뒤로 그들을 받쳐주는 아름다운 자연과 시대극의 충실한 재현이 볼거리를 만들어준다.

 

1940년대부터 영화화되기 시작하여 1995년 BBC에서 시리즈로 방영되어 큰 인기를 얻었고 그 뒤에 원작을 노골적으로 패러디한 ‘브리짓존스의 일기’까지 큰 인기를 얻었던 작품이라 2005년 영화화에 많은 이들이 그 성과에 대해 반신반의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나름대로의 작품성을 인정받아 여러 영화제에서 상을 타기도 하는 등의 성과를 거두었다. 개인적으로는 엘리자베스역의 배우가 맘에 들지 않는다. 너무 현대적으로 재해석되어 있기도 하거니와 약간 나온 턱이 시종일관 눈에 밟혔다.(-_-;) 아버지 역으로 나온 도널드서덜랜드는 극 내내 변변히 등장도 못하다가 말미에 엘리자베스의 결혼소식에 눈시울을 붉히는 촌철살인의 명연기를 보여준다.

 

18세기 페미니스트라 할 만한 제인 오스틴, 그리고 그의 알터에고였을 엘리자베스. 엘리자베스는 결혼에 성공하였고 제인 오스틴은 당시에는 찬밥 대우를 받았으나 오늘날 영국에서 세익스피어 다음으로 최고의 문학가로 손꼽히고 있다한다. 둘 모두에게 잘된 일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사랑에 대한 주체적인 선택이 결혼의 필수조건이라는 모던한 사고방식을 가졌다가 좌절했을 많은 여성들에게 원작은 오히려 여성해방 지침서가 아닌 싸구려 로맨스 소설로 간주되지 않았을까 하는 노파심이 들기도 한다.

동성애자의 천국을 노래하는 Big Eden

뉴욕에서 성공한 화가 Henry는 할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개인화랑 개업일을 코앞에 두고도 부랴부랴 고향 Big Eden으로 향한다. Henry는 할아버지와 정든 이웃들을 만나 오랜만에 푸근한 감정에 사로잡히지만 정작 그가 절실히 보고 싶은 이는 따로 있다. 고교시절 그가 좋아했던 건장한 체격에 핸섬가이 Dean. 이미 두 아이의 아버지에다 이혼남인 그를 교회에서 만나자마자 두근거리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는 Henry. 그런데 상황이 이상하게 꼬여가는 것이 마을의 유일한 잡화점 주인인 Pike(역시 학교 동창이다)는 엉뚱하게 Henry에게 삘이 꽂혀버린 것이다.

몸을 가누기 어려운 Henry의 할아버지와 Henry를 위해 수다스러운 Thayer 여사의 음식을 Henry네 집에 배달해주던 Pike는 여사의 음식이 맘에 안 들어 아예 요리책을 사서는 직접 요리를 해내버린다. 물론 할아버지보다는 Henry가 맛있게 먹어주길 바라며…. 하지만 천성적인 수줍은 성격 탓에 Henry에게 말을 걸기는커녕 같이 식사도 못하고 매번 돌아와 버린다.한편 할아버지가 쓰러져 다시 병원에 입원하던 날 집에 돌아온 피곤한 Henry와 Dean은 우연히 입맞춤을 하게 되지만 자신이 게이임을 아직 인정하지 못한 Dean이 차마 진한 입맞춤을 하지 못하고 입을 떼버린다. 이후 소원해진 둘 사이에 서서히 Pike가 끼어들어 어느덧 이 좁은 동네에서 게이 삼각관계가 펼쳐진다.

사실 영화는 지극히 비현실적이다. 이 청량하게 아름다운 동네의 주민들은 모두가 선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셋의 동성애 관계를 곧 눈치 채지만 누구도 그것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관계개선을 부추기기도 한다. 한마디로 게이들의 에덴동산이다(보수적인 기독교도들에게는 신성모독 적으로 느껴질 설정이겠지만). 이런 면에서 영화는 역시 동성애를 주제로 했지만 동성애자이기에 겪는 고민과 갈등을 허심탄회하게 술회한 Cachorro 와 비교된다. 오히려 이 작품은 어찌 보면 우리에게 익숙한 설정인 Cyrano 의 게이버전에 가깝다. 육체적으로 끌리는 Dean과 정신적으로 그에게 다가가는 Pike 사이에서 고민하는 Henry. 딱 Cyrano의 설정이지 않은가.

하지만이 영화를 단순히 게이코드를 이용한 그저 그런 코미디로 치부하기에는 무척 매력적인 것이 사실이다. 일단 재미있다. 에피소드 하나하나가 생동감이 있고 배우들의 연기가 궁합이 들어맞고 있다. 특히 Henry 역의 Arye Gross는 실제 게이가 아닌가 할 정도로 게이 연기가 훌륭하다. 그리고 풍경이 멋있다. 그 드넓은 자연을 담은 화면을 보고 있자면 사랑이니 뭐니 하며 아웅대는 인간사가 부질없게 느껴진다. 음악도 맘에 든다. 개인적으로 컨트리는 비호감 장르지만 이 영화에서 소개되는 컨트리 음악들은 껴안아주고 싶을 정도로 앙증맞다. 한마디로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참신한 영화는 아니지만 가끔 즐거운 마음으로 꺼내서 다시 볼 정도로 정이 가는 코미디다.

* Sex And The City 에서 Carrie의 절친한 게이친구 Stanford가 시골고향에 내려가면 이런 식의 해프닝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쓸데 없는 생각도 들었다.

공식 웹사이트

Billy Liar 와 River’s Ed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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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을 다룬 영화가 노년기를 다룬 영화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이유는 그들이 영화의 주된 소비계층인 이유도 있겠지만 그 시기가 인생에 있어 어느 시기보다도 이야깃거리가 많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방황하는 청춘’이니 ‘분노하는 청춘’이니 ‘아름다운 청춘’이니 하는 표현들의 형용사는 분명 ‘노년’이라는 명사보다 ‘청춘’이라는 명사에 더 착 달라붙는다. 그래서 질풍노도의 이 시기는 그들의 일상생활 자체가 영화가 될 수도 있다. Dazed And Confused처럼 말이다. 젊음은 분명 아름답다. 그 어느 시기보다 밝게 빛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어른의 몸과 아이의 마음을 가진 모순된 시기이기도 하다. 즉흥적이고 충동적이어서 행동은 빠르지만 책임은 지기 싫어한다.

Midnight Cowboy로 유명한 John Schlesinger가 메가폰을 잡은 Billy Liar 의 Billy(Tom Courtenay)가 바로 그런 무책임한 청춘이다. Keith Waterhouse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청춘영화에서 Billy는 거짓말을 또 다른 거짓말로 돌려막는 대책 없는 젊은이다. 서로의 존재를 몰랐던 두 명의 약혼녀와 회사 상사, 그리고 부모에게 있지도 않은 사실을 지어내고는 상상력이 풍부해서라고 둘러댄다. 상대가 자신의 거짓말을 간파하자 그들을 총으로 쏴 죽여 버리는 상상을 한다(이런 장면들은 루이스브뉘엘의 작품을 연상시키는 초현실적인 장면으로 표현되는데 그러한 점에서 다른 kitchen sink realism 계열 작품과 비교된다). 그렇지만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여인 Liz가 함께 런던으로 떠나자고 하자 그마저도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소심한 젊은이기도 하다. 밉상도 이런 밉상이 없다.  

동시대에 프리시네마 혹은 브리티시뉴웨이브를 주도했던 Lindsay Anderson이나 Tony Richardson이 신세대와 기성세대 간의 소통불능의 원인을 주로 제도권의 기성세대 탓으로 돌리며 은근히 신세대 편을 들어준 것과는 달리 John Schlesinger는 신세대 역시 자기성찰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넌지시 충고하는 것 같다. 그러나 한편으로 Billy에 대한 애정의 끈은 놓지 않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 캐릭터가 제법 인기를 얻어 연극, 뮤지컬, 심지어는 TV시리즈로도 인기를 얻었다. 이미 몇 차례 감상문에서 등장한 문학소년(?) Morrissey 역시 이 소설에 감화 받아 그의 노래의 가사 곳곳에 이 소설을 언급하였고 The Smiths 의 히트곡 “William, It Was Really Nothing” 이 바로 Billy Liar를 소재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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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현대로 넘어올수록 청춘의 무책임은 점점 극단적으로 치닫는다. Tim Hunter의 River’s Edge는 다큐멘터리를 찍는 마냥 냉정한 시선으로 탈선하는 청소년을 영상에 담아내었다. 큰 강을 접하고 있는 미국의 한 시골마을에 사는 John 은 여자친구 Jamie 를 강변에서 살해한다. 단순히 자신에게 심한 말을 했다는 이유 때문이다. Billy는 상상을 했지만 John은 실행에 옮긴 것이다. 그리고는 친구들에게 스스럼없이 그녀를 죽였노라고 이야기한다. 친구들이 강변으로 달려가 확인을 하지만 아무도 그녀의 시신을 거두거나 John을 신고하지도 않는다. 정말 무책임의 극치를 달리고 있다. 그나마 죄책감을 느낀 Matt(Keanu Reeves)가 신고를 하지만 이미 이들의 이기심과 무관심이 어느 정도인지는 충분히 까밝혀지고 난 후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Stand By Me, Gummo, 그리고 Blue Velvet 을 적당한 비율로 섞어 놓은 것 같은 매력적인 작품으로, 이 영화 덕에 Keanu Reeves는 Kathryn Bigelow의 눈에 띄어 ‘폭풍 속으로’에 캐스팅되었고 Tim Hunter는 Twin Peaks TV시리즈의 감독을 맡게 되었다. 이후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보다 밀도 있는 다큐멘터리적인 영상으로 청소년들의 삶을 포착해낸 Larry Clark 감독의 Kids와 비교하여 감상하면 흥미로울 것이다.

Paths Of Glory

개인적으로는 영화 감상할 때 롱테이크니 트래킹샷이니 하는 현란한 영상문법보다는 내러티브에 빠져드는 편이다. 영화에서의 영상기법이나 소설에서의 문체는 그 자체로도 감상포인트이긴 하나 역시 매력적인 이야기를 꾸며주는 양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탠리큐브릭의 이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그 시각적 요소의 탁월함과 현란함은 그 자체로도 매료될만한 마법을 지니고 있다.

개미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진격하는 장면이나 참호 속을 시찰하는 장면은 유사한 장면의 연출에 있어 고전으로 남을만한 – 또는 지금 재탕을 해먹어도 여전히 매력적일만한 – 표본으로 남을 교과서적인 사례이다. 물론 지나친 비주얼함이 극의 집중에 방해가 될 만도 하나 적어도 개인적으로 그로 인해 내러티브를 따라가는데 방해가 되지는 않았다.

대표적인 반전(反戰)영화로 자리매김하였고 프랑스 군인에 대한 – 또는 군대 체제에 대한 – 신랄한 시각으로 말미암아 1975년까지 프랑스에서 상영이 금지되었다는 이 작품은 큐브릭의 영화이력의 이정표로 인정되고 있는 역작이다. 그의 개인사적으로도 의미있는 작품일 수도 있는데 영화에 유일하게 등장하는 여배우 Susanne Christian 은 그의 평생의 반려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1차 세계대전 최대의 격전지였던 서부전선에서 사령관 역할을 하고 있던 Broulard 장군은 개인영달을 위해 가능성 없는 개미고지의 점령을 명령하고 Dax 대령은 이 부조리한 상황에서 부하들의 피해를 뻔히 알고도 진격명령을 내린다. 일부 부하들이 진격을 거부하는 바람에 결국 진격은 막대한 피해만 남긴 채 실패한다. 분노한 Broulard 장군은 희생양을 위해 무고한 사병 셋을 군사법정에 회부한다.

전직 변호사였던 Dax 대령은 그들을 변호하지만 법정에는 기소장도 없었고 증거제출도 거부한 채 사병들에게 사형을 언도한다. 그 와중에 Broulard 장군의 용서할 수 없는 또 하나의 명령이 양심적인 장교의 고백에 의해 밝혀지지만 군부는 사형언도를 취소 하기는 커녕 오히려 그 내용을 Broulard 장군의 축출에 활용한다. 이러한 더러운 암투에 Dax 대령은 진저리를 치지만 부하사병들이 포로로 잡힌 한 독일소녀의 노래에 나지막한 허밍으로 동참하는 모습에서 새로운 희망을 얻게 된다.

명백히 잘못된 명령임에도 이에 복종하였으나 이내 부하들을 감싸기 위해 희생양을 자처한 Dax 대령의 캐릭터는 선과 악의 명확한 이분법보다는 고뇌하고 끊임없이 부유하는 나약한 인간상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평가들의 호평을 얻었다. 그럼에도 말미부분에 암시되는 새로운 희망은 약간 작위적인 면이 없잖다. 차라리 부하사병들이 독일소녀의 노래를 함께 따라 부르기보다는 그녀를 더 그악스럽게 약 올렸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위와 아래에서 모두 배신당하는 Dax 대령의 모습이 더 드라마틱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