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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제 교사를 괴롭히는 학생들을 찍은 동영상을 보고 나서 든 상념

# 페북에 누군가 올린 기간제 교사를 괴롭히는 고등학생들의 동영상을 보았다. 굴욕적인 장면이지만 교사는 학생의 처벌을 바라지 않는단다. 암튼 학생들은 그저 교육받았을 뿐이란 생각도 든다. 기간제는 괴롭혀도 된다는, 이미 사회가 괴롭히고 있으니까 말이다.

# 기간제, 파견직, 비정규직. 자본주의가 발달하며 노동계급의 힘도 함께 발달하며 임금을 올리니까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자본가가 고안해낸 노동자 아래 노동자다. 사회는 그러고는 상대적 우위에 놓인 노동자를 “귀족노조”라고 매도하여 노노분열을 부추겼다.

# 노노분열을 일으키려는 이유는 딱 한가지다. ‘너희들이 천대받는 것은 나때문이 아니라 귀족노조때문이다’라는 착시효과를 일으키기 위해서인데, 이게 꽤 잘 먹혀들었다. 누구도 “귀족자본가”라고 부르지 않지만 정규직만 많은 회사도 “착한 회사”라고 칭송한다.

# 이제 정부는 정규직이라 할지라도 저성과자는 자르고 취업규칙도 불리하게 고칠 수 있게끔 하려고 한다. ‘노동자 지위 향상 – 비정규직 양산 – 정규직 고용안정 해체 – 모든 노동자의 각자도생’의 과정이 진행 중이다. 명심할 것은 치킨집은 차리지 말 것.

# 이러한 경제 체제를 공고하게 만드는 중요한 사회적 요인은 바로 문화다. 노동자를 천시하고, 잘못을 사과하지 않고, 이익을 위해 남을 해하는 것이 용납되는 문화가 제도만큼이나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 그 학생들만 욕할 수는 없다.

바다에 빠진 노동자라도 빚은 갚아야 한다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이 고용주에게 제공하는) 노동생산성이 계속 증가해온 이래 1970년대 이후의 역사상 가장 높은 이윤을 향유했다. (고용주가 노동자들에게 제공하는) 임금은 그렇지 못했다. 은행에 쌓인 증가일로의 이윤은 대부분 소비자 대출이 되었다. 1970년대 이후 소비자 신용의 분출은 고전적인 자본주의 모순을 이연시켰다. 그것은 급속히 확대되었을 때 나빠졌을 수도 있는 소비자 수요를 지탱해주었다. 자본가는 지구화된 노동력 덕분에 그들의 월급명세를 절약할 수 있었다. 그러나 2008년, 정체되어온 실질임금에 기반을 둔 점증해온 소비자 부채의 25년은 예상할 수 있던 한계에 도달했다. 노동자의 소득이 부풀어 오른 채무를 감당해내기에는 부족하다는 사실이 증명되었을 때, 그들의 파산은 – 소비자 부채에 투자한 금융회사들의 파산과 함께 – 2008년의 붕괴에 일조했다.[Capitalism – Not China – Is to Blame for the Current Global Economic Decline]

2008년의 금융위기가 단기적으로 미국의 부동산 시장의 거품뿐만 아니라 중기적으로 1970년대 이후 증가일로에 있었던 소비자 신용이 그 한계에 도달하여 유발되었다는 설명을 인용해보았다. 이글의 서론에도 언급하듯이 자본주의에는 다양한 형태가 현존하고 있다. 하지만 그 다양한 자본주의 형태의 현재시점에서의 공통점은 인용한 부분의 설명처럼 소비의 상당부분이 노동자이기도 한 소비자의 부채를 통해 채워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특성은 확실히 이전 세기 초반의 자본주의와는 확연히 다른 특성이다.

이러한, 소득과 소비의 불일치를 소비자 신용으로 채워온 자본주의 형태의 선두주자에서 한국을 빼놓을 수 없다. 예로 한국은 아파트라는 주거형태를 국가 규모의 거대한 소비자 신용을 통해 집단적으로 소비해온 소비자 신용 선진국이다. 이름도 걸맞게 “주택담보 집단대출”이다. 최근 몇 년간 진행되어온 아파트 개발 사업은 전형적으로 개발업자가 “부동산PF”를 통해 자금을 조달하여 아파트를 짓고, 이를 사들일 소비자는 자기 돈 일부에 “주택담보 집단대출”을 통해 자금을 조달하여 아파트를 사는 과정을 밟아왔다.

그래서 작년에 전국경제인연합회가 내놓은 『민간소비 부진의 원인 및 시사점』이라는 보고서에서 나열한 여러 원인 중 첫 번째가 바로 “가계부채”다. 보고서는 최근의 민간소비 부진이 “경기적 요인으로 보기 어려운 구조적인 문제가 있음을 암시”한다고 지적하며, “가계부채가 임계점에 도달”하였다고 단언하고 있다. 가계부채는 그 절대적 규모도 규모거니와 원리금 상환능력이 중요한데, 우리의 가계부문의 원리금 상환능력을 나타내는 개인가처분소득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2012년 말 163.8%로 매우 높은 수준이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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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 Austria shipwreck” by Unknownhcandersen-homepage.dk. Licensed under Public Domain via Commons.

한편 정부는 지난 12월 16일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의 성과를 구체화”하고자 할 목적으로 『2016년 경제정책방향』을 내놓았다. 이 발표에서 제시한 가계부채에 관한 정책방향은 “주담대 분할상환 관행 정착”과 “집단대출의 건전성 관리”다. 즉, 만기 일시상환 위주의 대출을 분할상환으로 유도하고 집단대출이 실수요자 위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겠다는 정책인데, 이 정도면 근본적인 부채대책이라기보다는 미세조정에 가깝다. 이는 전경련조차 “임계점”이라고 규정한 심각한 가계부채의 근본대책이라 보기에 미흡하다.

『2016년 경제정책방향』에서 실질적으로 가계부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편인 가처분소득을 늘릴 수 있는 대책으로는 “정규직 전환 및 근로자 임금증가액에 추가 세액공제 부여” 등이 있다. 실제로 기획재정부는 이미 작년에 ‘가계소득 증대세제’ 3대 패키지를 도입한 바 있고, 그 덕인지 2015년 국내총소득 증가율도 전년기 동기 대비 경제성장률을 상회하였다.2 하지만 여전히 중기적으로 세금·사회보험료 등 비소비지출 부문의 부담 증가3, 전월세 가격의 폭등4은 가처분소득을 감소시키고 있어 그 실효성이 의심스럽다.

보다 근본적으로 부채에 허덕이는 가계에 직격탄을 날리는 상황은 부족한 소득마저 빼앗아가는 실업이다. 인용문에서도 지적하듯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지구화된 노동력은 노동자가 언제라도 직업을 잃을 수 있는 전제를 제공하고 있는 한편으로, 국내 경기의 장기침체 조짐에 따른 상시적 인력감축은 노동자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 신입사원마저 “희망퇴직”의 희생양으로 만드는 기업의 인력감축정부의 일반해고 요건 완화 시도는 체제적 위기의 풍파에 시달리는 배에서 노동자들을 우선 바다에 던져 넣겠다는 것이다.

물론 바다에 빠진 노동자라도 빚은 갚아야 한다.

한국에 헝그리 정신이 사라졌다는 연합뉴스

한국에 ‘헝그리정신’이 사라졌나…노동의욕 61개국중 54위

오랜만에 추억의 걸작 ‘넘버3’를 생각나게 하는 신문기사를 접했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연구원(IMD)이 최근 발표한 ‘2015 세계 인재 보고서'(IMD World Talent Report 2015)의 내용을 전하면서 국내 전문가들의 분석을 함께 엮은 연합뉴스의 이 기사는 노동의욕이 저하된 트잉여들을 빡치게 하는 기사 제목 덕택에 아침부터 트위터 타임라인에 핫이슈로 등장하였다. 더불어 앞서 언급한 넘버3의 “헝그리 정신” 일화도 다시 화제다.

“전문가”에 의해 순위가 낮은 것은 “헝그리 정신이 없기 때문”이라고 지적받은 항목은 ‘노동자 의욕(Worker Motivation)’ 항목이다. 한국은 이 항목에서 조사국가 61개국 중에서 54위로 최하위권으로 머물렀다. 그런데 그 의욕은 누가 측정한 것일까? 바로 기업 임원의 설문을 통해 측정된 것이다. 고용주 입장에서의 주관적인 의견이다. “헝그리 정신이 없기 때문”에 노동 의욕이 없다는 말은 누가 했을까? 임상혁 전국경제인연합회 상무다.

한편 가장 자발적으로 일한다는 평가를 받은 국가는 스위스, 덴마크, 노르웨이 등의 나라다. 이 나라들은 세계 최고의 부국인데도 불구하고 전경련 상무의 분석에 따르면 “헝그리 정신”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는 국가랄 수 있다. 한편 전경련 상무는 “선진국이 아닌데 선진국인 줄 안다”는 말도 덧붙였다. 요컨대 우리 노동자들은 선진국이 아닌데도 선진국인줄 알고 헝그리 정신이 없어져서 기업 임원들 보기에 노동 의욕이 없어져 버린 것이다.

한편 이와는 다른 분석을 하는 이의 의견도 기사에 언급돼있다. 허대녕 기초과학연구원 전략정책팀장은 “고급 일자리가 없는 것이 문제. 기업과 연구소의 환경도 미국 같은 나라보다 너무 열악하다. 야근이 잦은데다 고용 불안도 심하다”고 말했다. 이 의견은 앞서 전경련 상무와 반대되는 의견이다. 허 팀장의 분석에 따르면 우리 노동자는 “헝그리 정신”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실제로 헝그리하기 때문에 노동 의욕이 없다는 의견으로 들린다.

실제로 보고서의 조사항목 중에서 한국이 ‘노동자 의욕’과 비슷한 순위에 머물러 있는(56위) 항목이 ‘생계비(Cost-of-living) 지수’다. 이 항목에서 우리와 비슷한 순위를 차지한 국가는 앞서 노동 의욕이 강하다는 스위스나 덴마크가 있다. 그런데 이들 나라는 임금이 우리나라보다 높다. 우리나라는 그 나라보다 임금도 낮고 노동시간은 더 긴데도 생계비는 비슷한 수준이다. 그러면 전경련 상무보다 허 팀장의 분석이 더 설득력 있는 분석이 아닐까?

기업임원이 노동자의 의욕이 없다고 평가하고 기업이익대변단체 임원이 헝그리 정신이 없어서 그렇다고 비아냥거리고 그걸 그대로 기사제목으로 쓰는 상황. ‘넘버3’보다 더 웃긴 코미디다.

샌프란시스코에 등장했다는 무인(無人) 레스토랑에 대한 단상

지난주에 난 빠르게 움직이는 줄에 서서 평면 모니터에 나오는 각각 6.95달러(브리토 볼, 벤토 볼, 발사믹 비트)인 여덟 개의 퀴노아볼(quinoa bowls) 메뉴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아이패드로 내 주문을 눌러 메뉴를 고른 후 지불했다. 신용카드에서 취한 내 이름이 다른 스크린에 뜨고 음식이 준비된 후 다른 화면에 번호가 떴다. 그 번호는 내 음식이 곧 나타날 칸의 번호였다. 그 칸들은 음식이 비축되면 어두워지는 투명한 LCD 스크린들 뒤에 위치해있다. 인간이 개입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손가락으로 두 번 두드리자 칸막이가 열렸고 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Restaurant of the Future? Service With an Impersonal Touch]

최근 샌프란시스코에 문을 연 퀴노아 식당인 잇사(Eatsa)라는 곳에 대한 뉴욕타임스 기사 일부다. 고대 마야인이 먹었다는 곡물인 퀴노아가 자연식을 추구하는 서구의 힙스터들에게 인기를 얻게 된 지는 꽤 된다. 그래서 새로운 퀴노아 식당이 생겼다고 해서 그리 새로울 것은 없지만, 그럼에도 이 식당이 주목을 받고 있는 이유는 이곳이 무인(無人)시설로 운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식당의 설립자 David Friedberg는 식당이라기보다는 음식배달 시스템이라 여겨달라고 했다지만 주문된 음식을 상업공간에서 함께 먹는다면 그건 누가 뭐래도 식당이지 배달서비스는 아닐 것 같다.

자동화에 따른 식당 등 각종 서비스의 무인화는 사실 새로운 개념은 아니다. 20세기 초의 공상과학적 상상력을 가지고 있던 대중문화 예술인들은 이런 개념을 큰 어려움 없이 상상하여 자신들의 작품에서 묘사하기도 했고, 폭넓게는 아니지만, 극소수 혁신적인 미래주의적 기업가에 의해 현실에서 실현되기도 한 적이 있다. 이후 실제로도 많은 식당 서비스가 자동화되어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사회를 선도해나갔다. 대표적인 서비스 및 상품이 바로 맥도날드로 대표되는 햄버거 푸드체인이다. 일관화되고 표준화된 생산 매뉴얼에 따라 만들어지는 – 요리라기 하기에는 어색한 – 그 곳 말이다.


1900년대 초 베를린에서 있었다는 자동화 식당의 풍경. 지금의 Eatsa의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다.

직접 가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잇사는 이미 상당히 무인화된 카페테리아와 같은 곳에서 그나마 인간노동의 영역으로 남아있던 조리, 주문, 계산, 청소와 같은 노동마저 자동화시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것이 가능하게 된 데에는 짐작건대, 조리 과정 단순화 및 무인화, 아이패드 등 전자기기를 통한 주문 및 계산 서비스 자동화, 별도의 설비작업을 통한 청소 서비스 무인화 등의 요소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서비스는 앞으로 가격과 품질의 조화만 이룬다면 입맛이 까다로운 고객이나 사람과의 소통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고객을 제외하고는 상당수 고객을 유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얼마 전 사석에서 만난 한 기자가 말해줬는데 인간과 컴퓨터가 각각 스포츠 경기 결과에 관한 기사를 작성하여 기자들에게 기사 작성주체가 누구인지 짐작하게 했는데, 상당수 기자들이 누가 작성한 기사인지를 제대로 맞히지 못했다고 한다. 이렇듯 기계의 발전이 이런 추세로 나아간다면 장래에 제조업 프로세싱이나 식당 등 반복적인 단순 노동뿐만 아니라 스포츠 기사 작성, 금전 출납, 운전과 같은 좀 더 복잡한 노동, 나아가 비평 칼럼 작성, 의료 진찰, 법률 상담과 같은 고도의 정신적 판단을 요구한다고 여겨지는 노동에까지 기계의 작동이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지 말란 법이 없을지도 모른다.

인간이 노동으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은 나쁜 소식이 아니다. 문제는 대다수 노동자에게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은 곧 임금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잇사와 같은 개별자본의 입장에선 노동자가 직업을 잃어 소비활동을 하지 못한다는 점은 중요하지 않다. 광범위한 자동화와 이로 인한 소비자층의 붕괴는 아마도 정치인, 총자본, 노조 등에서나 신경 쓸 의제가 될 것이다. 이나마도 자동화에 의한 노동시장의 붕괴는 마치 기후변화처럼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를 옥죄어 오는 것이기에 난민, 복지, 최저임금 등 보다 급박한 현안에 의해 우선순위에서 밀려있게 될 것 같다.

대다수 노동이 자동화에 의해 대체된다면? 기본소득이 답일 듯.

요새 아이들 시험문제는 왜때문에 이렇게 어려운 것인가?

지인의 페이스북에 올린 딸의 사회 시험지다. 문제를 보면 요즘 시험이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다만 13번 문제는 反노동적인 이 사회의 분위기를 생각한다면 어렵지 않게(?) – 시험을 보는 이가 反노동적인 관점으로 시험에 임했다면 – 답을 맞힐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문제는 14번 문제, “기업가들의 노력이 우리 경제에 미친 영향으로 알맞지 않은 것은 어느 것입니까?”란 질문에 답하는 문제다.

 

오지선다형 객관식의 이 문제에 대해 어느 정도 경제활동을 하고 있는 나조차도 솔직히 답을 찾지 못하겠다. 교사가 원하는 답은 1번 “수입을 늘렸다”라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이 시험 문제를 풀어서 틀린 친구가 내 딸이라면 이 답을 추출하는 과정에서의 수많은 전제가 생략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해, 과연 내가 딸에게 차근차근 잘 설명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던지면 도저히 자신이 없다.

이 문제의 정답이 “수입을 늘렸다”라는 문제 출제자의 기업가, 혹은 기업에 대한 시각은 출제자의 기업에 대한 시각이 딱 개발도상국의 수입대체 산업화 발전전략의 시각에 머물러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기업가가 기업을 성장시키면 기업이 이전에 우리나라에서 생산되지 않던 볼펜도 만들고 핸드폰도 만들고, 소비자가 외제 제품에 대한 수요가 줄어 수입이 줄 것이다”라는 그런 선입견 말이다.1

2번의 “기업을 발전시켰다”는 항목은 동어반복적인 항목이라 당연히 답이 아닐 것이다. 한편 3번의 “국가 경제를 발전시켰다” 역시 개별 기업의 성장과 국민경제의 성장을 동일시하는 개발도상국의 일국경제의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고다. “근로자들의 소득을 높였다”, “새로운 일자리를 늘렸다”라는 나머지 항목 역시 자본의 금융화, 세계화에 따른 추세를 반영하지 못한 구태의연한 편견이다.

즉, 예를 들어 LBO식의 M&A를 주업으로 하는 “기업가” – 소위 “프라이빗에쿼티” – 는 근로자들의 일자리를 늘리거나 소득을 높이는 기능을 거의 하지 않는다. 이들은 기업을 인수한 후 구조조정을 – 가장 손쉽게는 근로자들의 정리해고와 임금삭감 – 통해 이익을 쥐어짜는 임무를 수행한다. 교사는 아마도 그러한 업태의 기업가는 시험문제의 “기업가”에 포함하지 않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인의 딸은 답이 5번이라고 응답해서 틀렸다. 지인의 딸이 어떤 배경지식을 가지고 이렇게 문제를 풀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아이가 업장을 필리핀으로 옮겨서 국내 노동자의 일자리를 뺏은 한진중공업의 예를 들어 교사에게 항의를 했을 때 교사가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궁금하다. 일국경제적 관점에서 생각하는 교사가 설마 “글로벌 경제적 관점에서는 일자리가 늘었다”라고 대답했을 것 같지는 않다.

로봇이 내 일자리를 빼앗는 것인가? 노동으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것인가?

NPR은 최근 시장보고서를 내고 향후 20년 내 로봇에 의해 대체될 가능성이 높은 직업군 20개를 선정하였다. 이 직업군에는 전기전자제품 조립공, 보석가공연마사, 계산대 점원 등 단순반복 작업이 주를 이루는 제조업 및 서비스업의 직종이 다수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의외로 회계 장부 담당자나 은행원과 같이 상대적으로 복잡한 작업을 하는 서비스업 직종도 포함되어 있으며, 패션모델과 같은 의외의 직종도 포함되어 있다.

▲11위, 차량운전사=운전사,개인운전사들이 자동화될 가능성은 97.8%다. 운전자들은 더 이상 필요치 않을 것이다. 구글의 자율주행차는 인간이 개입 없이 수천마일을 시험해 왔다. 또한 트래비스 캘러닉 우버 최고 경영자(CEO)도 궁극적으로 모든 자동차가 운전자들을 대체하게 될 것이라고 발표했다.[로봇이 내 일자리 뺏는다. 안전한 직업군은?]

특히 운전사는 이미 구글의 무인운전차량 개발 프로젝트 등을 통해 끊임없이 무인화의 도전을 받고 있는 대표적인 직종이다. 머지않은 시대에 우리는 SF영화 토털리콜에서나 보던 피노키오처럼 생긴 로봇 운전자가 행선지를 묻는 택시에 승차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상용화 시대를 앞당기고 있는 주체는 당연히 인용기사에 언급된 구글이나 우버와 같은 사적기업이다. 특히 우버는 구글보다 더욱 더 상용화에 목을 매고 있다.

우버는 언젠가 자사의 계약 운전사 수만 명을 대체할 수 있을 무인차를 꿈꾼다. 하지만 내부적으로 무인차 개발 역량을 전혀 갖추지 못한 우버는 곧바로 ‘드림팀’ 구성을 할 수 있는 곳으로 눈을 돌렸다. 바로 카네기멜론대의 국립로봇공학센터(NREC)다. 투자자들에게서 조달한 50억 달러의 현금으로 무장한 우버는 일부 NREC 소속 과학자들에게 수십만 달러의 보너스와 현재 연봉의 두 배를 제시했다. [우버, 산학협력 맺은 카네기멜론大 연구진 빼가]

처음에 “공유경제”라는 그럴듯한 이름을 달았던 우버가 번창하는 실제 이유는 “주문형(On-Demand) 경제”나 “하인(Concierge) 경제” 모델에 기반을 두었기 때문임은 이 블로그에서도 몇 번 말한 바 있다. 즉 우버는 운전이라는 서비스 노동에 활용할 노동력을 비정규/비정형화하여 비용을 절감하여 수익을 창출하고 있다. 이러한 모델에 대한 비판도 적잖은 상황이지만, 우버는 사실 그 상황마저 뛰어넘는 궁극의 무인화의 길로 가려하고 있다.

잠깐 옆길로 새자면 처음에 대리운전 업체 비슷하게 시작한 우버가 학교의 연구 인력을 빼나가는 블랙홀이 된 과정이 참 흥미롭다. 결국 우버는 앞서 말한 비용 절감 모델을 스마트폰 앱이라는 수단을 통해 ‘규모의 경제’ 化하여 성공하였다. 벤처캐피탈은 그 가능성에 베팅하여 투자를 했고, 우버는 그 잉여자금을 현재 수익모형의 다음 단계에 베팅하기 시작하였다. 미국이 아니고서는 볼 수 없는 역동적인 투자환경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각설하고, 관건은 우버가 이렇게 산학협력을 빙자한 인력 빼오기를 해올 정도로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프로젝트가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의 여부일 것이다. 사견으로 우버가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어느 기업인가는 그 비즈니스 모델을 구현해낼 것이라 여겨진다. 그리고 가까운 미래에 우리는 Siri에게 “차 좀 불러줘”라고 주문하면 집 앞에 무인운전차량이 대기해 있는 장면을 목도할 것이다. 인간은 이렇게 노동으로부터 해방되어 가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 대부분이 노동자라는 사실이다. 텔레마케터인 24세 여성인 미선 씨는 무인택시라면 운전사의 성희롱이나 난폭운전이 없어질 것이라며 좋아할지도 모른다. 문제는 본인의 직종이야말로 로봇化로 인해 없어질 직종 1위라는 점이다. 언젠가 그는 출퇴근을 위해 무인택시를 탈 필요도, 택시비를 지불할 돈도 없을지도 모른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노동자는 로봇化로 인해 노동뿐 아니라 월급으로부터도 해방되는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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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biddenplanetposter” by Copyrighted by Loew’s International. Artists(s) not known. – http://wrongsideoftheart.com/wp-content/gallery/posters-f/forbidden_planet_poster_01.jpg. Licensed unde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이렇듯 사적소유에 의해 지탱되는 자본주의는 기술발전 등으로 인한 자동화 혜택의 절대다수가 주주에게 귀속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한편 칼 맑스는 자본을 “가변자본”과 “불변자본”으로 나누고, 개별 자본은 가변자본인 인간의 노동을 가치의 변화가 없는 불변자본인 기계로 대치하여 상품의 가치를 전유하려는 속성이 있음을 설명한 바 있다. 그리고 개별 자본에게 있어 합리적인 이러한 의사결정이 사회의 이윤율을 하락시킬 것이라 예측하였다.

말인즉슨, 우버 등 개별자본이 로봇化를 통해 경쟁력을 가져 상대적 고수익을 누리는 것은 자본주의 고유 속성이고 이런 자동화가 차츰 일반화되면 노동자로부터의 착취율이 떨어져 사회 전체의 이윤율이 감소한다는 것이 칼 맑스의 논리다. 이 법칙이 “경향적 저하의 법칙”이란 희한한 이름을 가지고 있는 만큼 애매한 구석이 있긴 하지만 시사점은 있다. 노동자는 이제 착취당할 여지도 없게 되고 무인택시를 이용할 소비자도 사라진다는 점이다.

이러한 경향이 바로 오늘날 미국이나 일본과 같은 첨단 자본주의 국가의 지도자들이 기업에게 노동자의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이유다. 개별 자본은 자동화를 통해서든 구조조정을 통해서든 계속 수익극대화를 추구하고 제도는 이를 정당화하고 있지만, 그로 인해 총자본이나 사회전체는 성장이 둔화되거나 심지어 정지할 수 있는 위기로 몰리기 때문이다. 오바마는 다만 노동자라는 생산자가 동시에 소비자라는 평범한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을 뿐이다.

이 모델에서 랑게는 신고전파의 전통 특히 바로네가 정식화해놓은 전제들을 그대로 따랐다. 이러한 형태의 사회주의는 생산수단의 국가 소유를 기초로 하고 있다. 개인들은 각자 자신의 직업과 소비재를 자유롭게 선택하며, 이것들은 “진짜 시장”에서 매매된다. [중략] 피고용자들은 소득을 얻고 또 추가로 “사회적 배당금” 즉 “사회가 소유하는 자본 및 천연자원에서 나온 소득의 개인 몫”을 얻게 되어 있다.[신자유주의의 좌파적 기원, 조하나 보크만 지음, 홍기빈 옮김, 글항아리, 2015년, pp75~76]

칼 맑스 등 사회주의 사상가들이 꿈꾼 생산력이 극대화된 미래에 인간은 고통스러운 노동으로부터 해방될 것이다. 그리고 시장 사회주의자 오스카르 랑게가 꿈꾼 사회는 어쩌면 칼 맑스도 이야기한 “자유로운 생산자 연합”의 보다 구체적인 로드맵일 수도 있다. 문제는 노동자가 무인택시를 즐기며 “사회적 배당”을 받으려면 노동자 스스로가 기업의 주주가 되어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현재 우리는 그런 길이 제한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다.

현실에서 “사회적 배당”의 특징을 지닌 존재는 연기금으로부터의 연금 정도다.

“그들만의 리그”를 위한 울타리로써의 “무급인턴”

주요 직업들이 중산층의 전유물이 된 결정적인 배경에는 인턴직의 증대가 있다. 무급 인턴직은 특히 정치·법조·미디어·패션 분야에서 번성하고 있다. 1,500명의 대학생과 대졸자들을 상대로 벌인 최근 설문조사에 따르면, 청년층의 3분의 2가 경기침체 때문에 무급으로라도 일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끼는 것으로 조사됐다. 많은 젊은이들이 눈앞에 당근처럼 내걸린, 그러나 결코 주어지지 않을 유급직 전환을 바라보며, 인턴을 마친 뒤 또다시 인턴직에 취업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착취가 아니다. 그것은 부모에 빌붙어 사는 부유한 젊은이들만 유급 일자리를 위한 경쟁에 뛰어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략] 의회 연구원 조합인 ‘유나이트’에 따르면, 의회 인턴 가운데 최저임금을 받는 경우는 100명에 하나 꼴도 안 된다.[차브 영국식 잉여 유발사건, 오언 존스 지음, 이세영 안병률 옮김, 북인더갭, 2014년, pp267~268]

요즘 우리사회에서 소위 “열정페이”라는 씁쓸한 표현이 유행어가 되었다. “애플페이”나 “삼성페이”처럼 스마트 기기에 의한 신기술 결제방식이 아니다. 바로 위 인용문의 설문조사에 나오는 것처럼 무급으로라도 일해야 하는 의무감을 느끼는 청년층 구직자를 대상으로 유급직의 전환 혹은 경력에로의 활용 등을 미끼로, 그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면서도 ‘너의 열정을 높이 사서 일을 시켜주는 것이다’고 적반하장 격으로 꼰대질하는 상황을 묘사하는 말이다.(보다 자세한 설명은 여기로)

이러한 상황이 요즘의 한국에서도 비일비재한 일이라 – 표현도 “재능기부” 등으로 매우 아름답게 포장되어 있다 – 온라인 커뮤니티나 소셜네트워크에서도 이와 관련한 일화가 가끔씩 소개되어 사람들을 분노케 한다. 외교부 무급인턴 모집, 영사관 무급인턴 모집, 희망제작소 재능기부자 모집 등 여러 사례가 생각난다. 당시 대체적인 반응은 “일을 시키려면 돈을 줘라”라며 화를 내는 반응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이들 무급인턴의 문제는 인용문에서 보는 것처럼 그리 단순하지 않다.

즉, 이러한 고도의 “스펙”을 쌓을 수 있는 기회가 무급이기에 그 자리에 응모할 수 있는 이는 “부모에 빌붙어 사는 부유한 젊은이들”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문제다. 부모덕에 좋은 교육을 받은 젊은이는 역시 부모덕에 ‘외교부 인턴’ 등 양질의 ”배움과 실습의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다. ”무급인턴“의 착취성에 대한 여론이 일자 외교부는 “미 국무성과 일본 외무성 역시 무급인턴쉽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고 항변했던바 이러한 캥거루식 스펙 쌓기는 우리나 영국만의 상황은 아니다.

하지만 외교부는 바로 그 미국의 무급인턴들이 임금 지급을 요구했다는 사실에는 아마도 눈을 감을 것이다. 세계정치의 중심인 백악관에서 무급으로 근무했던 이들이 2013년 정당한 보상을 요구한 적이 있는데, 이들은 주중 9시간씩 일하면서 보수를 받지 못했다 한다. 고용주는 얼마 전 최저임금 인상을 주장하는 연설로 진보의 칭송을 받았던 오바마다. 이렇듯 “무급인턴쉽”은 없는 이에게는 일종의 희망고문이자 “그들만의 리그”에의 편입을 막는 또 하나의 울타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