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강학파?

정부와 금융권에서는 박근혜 대통령 성향에 맞는 ‘서강학파’ 인사가 오를 것이란 관측이 높다. [중략] ‘서강학파’이면서 박근혜 대통령의 씽크탱크인 김광두 국가미래연구원장도 하마평에 올랐다. 김 원장은 2007년부터 경제 공부모임을 주도해 박 대통령의 경제 과외교사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박 대통령과 인연이 깊다.[우리금융 '회추위' 출범… 차기 회장은 누구?]

우리금융지주회사의 회장 자리가 공석이 되면서 그 향후추이를 관측하는 기사가 이어지고 있는데 이 기사도 그러한 예측기사다. 내 흥미를 자극하는 것은 차기회장이 누구인가보다 기자가 사용한 “서강학파”라는 표현이다. 경제학이라는 학문이 반드시 외래에서 유입된 학문은 아닐지라도 우리가 배워왔고 현실에 적응하고 있는 이론이 거의 대부분 외래에서 유입된 현실에서, 과연 위와 같은 표현이 유효한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남 교수의 입각은 한국 현대사에서 경제관료 집단으로 서강학파의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서강학파는 철저한 성장론자로 분류되고 있다. 서구식 경제 근대화 모델을 토대로 대기업·중화학공업 중심주의적인 경제정책을 펼쳤으며 수출지상주의, 신성장 후분배 등을 통한 압축 성장을 꾀했다. 한마디로 업적 제일주의적인 경제정책이 서강학파의 특징으로 분석되고 있다.[한국의 경제를 움직이는 인맥 대해부 서강학파 VS 학현학파]

한 신문이 국내 경제학파의 계보를 분석한 기사에서 설명한 서강학파의 특징이다. 이렇게 쓰고는 있지만 기사 논조는, 해외유학파를 통해 외래 유입된 국내 경제학 사조에서 “OO학파”를 지칭할 만큼의 독자성과 사상적 동질성을 가진 학파가 있는 가에 대해 회의감을 나타내고 있고 나 역시 대체로 동의하는 바이다. 특히나 서강학파는 인용문에 언급된 남덕우 씨를 비롯하여, 관료로 활동한 이들을 묶어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들의 공통점이 있기는 하다. 선도적으로 해외 유학을 다녀왔다는 점, 서구의 주류경제학을 공부하였다는 점, 관료로 활동하면서는 성장위주/수출주도의 국가 개입주의적 경제정책을 펼쳤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어떠한 사상적 맥락에서의 공통점이라기보다는 유학을 통한 서구사상의 적극적 수용을 기회로 입각되었고, 이후 위정자의 통치철학을 충실히 따랐다는 행태적 공통점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한국 경제를 움직였던 인맥을 학파로는 인정하지 않은 경제학자들이 다수 존재하고 있는 것 역시 이 때문이다. 즉 이들 대부분이 지향하는 이론은 합리적 시장자율경제를 지향하는 신고전학파로 분류되지만 실제 적용하는 경제 원칙은 자율시장경제 원칙과는 거리가 멀었던 게 현실이었다는 분석이다. 경제평론가 이성태 씨는 “한국의 경제 인맥은 이론적 동질성에 의한 집단이 아니다”고 잘라 말한다. 하나의 이론 체계를 고집하는 학자집단이 아니라 친소관계에 의해 형성된 친목집단이라는 게 이씨의 주장이다.[한국의 경제를 움직이는 인맥 대해부 서강학파 VS 학현학파]

물론 이성태 씨의 독설이 지나치다고 여길 소지도 있겠지만 서강학파에 있어서만큼은 어느 정도 비난을 감수할만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대부분 신고전파 경제학 등 주류경제학을 공부하고 시장경제를 옹호하며 ‘국가개입 최소화’ 등을 역설했지만, 입각 이후에는 “성장주의적 근대화론자”로 바뀌었다는 공통점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출세 경로 상에서의 공통점이지 사상적 맥락에서는 오히려 이율배반적인 성격이 강해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남덕우 씨의 “정치 지도자가 정책 방향을 제시하면 거시적 이론 테두리에 두들겨 맞추는 테라노크라트 역할을 한 것에 불과”했다는 자괴감 섞인 발언에서도 정황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서강학파라는 호칭은 타인에 의한 꼬리표인지라, 당사자들로서는 지나친 한데 묶기 내지는 폄하가 억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시의 적절하게 다시 서강학파가 紙上에 언급되고, 이를 은근히 즐기는 이들이 있다면 여전히 비판도 유효한 것이 아닐까?

주식회사 제도의 역설

근대 서양의 발전은 중세 유럽의 가난에서 시작되었다. 국내 시장이 협소한 유럽인은 어쩔 수 없이 먼 바다로 나아가야만 했고 모험을 통해 발전의 기회를 찾아야만 했다. 주식 제도 역시 위기의 분담에서 나왔고, 고위험과 고이윤의 경영을 위해 공동의 자금을 모집했다. 그러나 중국은 이런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외국인과의 거래에서 항상 이윤이 보장됐고 상인의 자금도 풍성하여 조정은 엄청난 부를 누렸다. 당시 서양인의 눈에 중국은 도자기와 비단의 나라이자 아름다운 수공예품과 감탄이 절로 나오는 전통 문화를 보유한 나라였다.[백은비사, 융이 지음, 류방승 옮김, 박한진 감수, 알에이치코리아, 2013, p148]

중국인 학자의 눈으로 본 근대의 세계 경제사다. 중국인의 눈으로 보다보니 비교적 덜 알려진 중국의 경제사가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왜 중국으로 수많은 은(銀)이 유입되었는지, 중국은 왜 대항해 시대에 뒤쳐졌는지 등을 동시대 유럽의 상황과 비교하여 설명하고 있다. 인용한 부분은 그 중에서도 자본주의의 근간을 이루는 주식회사 제도가 왜 중국에서 자리 잡지 못했는지에 대한 설명이다.

그 이유는 이미 부가 소수에 의해 충분히 축적되어 있었고 권력체제는 여전히 봉건왕조 치하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중국은 당시 세계최고의 수준의 각종 진귀한 농산물과 공예품의 생산국 이였다. 서양인들은 이런 상품들을 구입하기 위해 그들의 식민지에서 캔 금은을 들고 중국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니 중국인 자금조달을 위해 주식제도와 같은 복잡한 기법을 도입할 필요성을 못 느꼈다.

한편, 인용문처럼 협소한 대륙을 가진 유럽인은 소위 “대항해 시대”에 접어들어 또 다른 세상에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진 귀금속을 찾기 위해 모험에 나서야 했다. 그리고 그 자금도 귀금속을 찾아낸다는 가정 하에 그것을 담보로 자금을 조달하는,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일종의 벤처캐피탈 내지는 프로젝트파이낸스 기법을 도입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美대륙을 약탈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다.

콜럼버스가 유럽의 왕가들로부터 자금을 조달했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사모(私募)펀드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면, 백여 년 뒤 네덜란드에서 설립된 동인도회사는 공모(公募)의 형태를 가진 회사였다. 세계 최초의 주식제도와 세계 최초의 국유기업으로 알려진 동인도회사는 준정부의 성격으로 무역 독점권을 보유하고, 다른 나라와 조약을 맺고, 식민지를 통치하고, 용병을 조직하고, 화폐를 발행했다.

어쨌든 이러한 주식회사 제도는 자금의 흐름을 원활하게 하여 경제를 활성화시키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노동가치론의 견지에서 가치를 창출하는 동력이 궁극적으로 1,2차 산업과 같은, 이른바 “생산노동”이라 할지라도 그 생산 과정을 가속화시키는 것은 자본의 원활한 투입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여전히 미국의 벤처기업이 전 세계를 주도하는 원인에는 미국의 발달한 직접조달 시장에 있는 것도 한 주요원인이다.

동인도회사는 식민 무역 이익을 담보로 일반 시민들에게 돈을 빌리기 위해 주식을 발행한 것이다. 누구라도 주식을 살 수 있었다는 점에서 순식간에 사람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세계 최초의 증권거래소가 1609년 암스테르담에 설립되었다. [중략] 뜨거운 주식 구매 붐을 타고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총 650만 네덜란드 휠던(gulden : 네덜란드의 화폐 단위. 길더 – 옮긴 이)의 자금을 모집했다. [중략] 이렇게 무수한 네덜란드 민중이 무의식적으로 잔혹한 식민 무역에 휩쓸리다 보니 동인도회사가 태평양 군도에서 자행하는 노예무역이나 토착민 강제 노동, 무력으로 인도네시아를 정복한 일 따위에 대해서는 크게 추궁하지 않았다.[같은 책, pp111~112]

한편, 위 사례는 주식회사라는 “금융의 민주화”가 한 사회의 도덕성을 어떻게 마비시키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콜럼버스의 항해가 콜럼버스 개인과 군주들의 악행에 그쳤다면, 동인도회사는 주식 제도라는 “민주화”된 제도를 통해 시민을 잔혹한 식민주의에 동참시킨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도덕심의 off-balance 化는 이제 상당히 보편화되어 있다. 노동자가 주식을 사면 그 회사의 노동자 권익에는 둔감해지게 마련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자산소유의 민주주의”를 통한 체제 보수화는 주식제도, 민영화, 모기지 등을 통해 보편화됐고, 이 점이 “경제 민주화”의 역설이기도 하다. 즉, 다양한 자금조달을 통해 한 덩어리가 된 여러 계급은 해당 사안에 있어서만큼은 동일한 이해관계를 가지는 자본가 계급이 된 셈이다. 협동조합, 사회책임투자 펀드 등 다양한 대안이 모색되고 있는데 어떤 제도가 기존의 제도를 극복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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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인플레를 활용하는 방식의 경제개발”에 관한 보론

특히 한국은 수출 증가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는데, 이 목표를 추진하기 위해서 국내적으로 많은 반대가 예상되는 조치들을 취해야 했다. 미국은 우선 원화의 가치절하를 주장했다. 원화의 가치가 절하될 경우 한국 상품의 가격 경쟁력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가 조언을 받아들여 원화의 가치를 1달러당 130원에서 256원으로 절하하는 환율 조정을 단행하자, 곧바로 격렬한 저항과 반대가 일어났다. [중략] 한 신문은 원화의 가치절하가 “가격 악순환의 소용돌이”를 초래할 것이라고 예상하였으며, 일부 국회의원은 정부의 결정을 “완벽한 실수”라고 비난하면서 이 조치로 인해 국민이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중략] 주한 미국 대사관은 “실제로 원화의 가치절하가 단행되면 전반적으로 국내 물가가 상승할 것이다. (…) 단기적으로 볼 때, 한국 정부는 미국이 추가로 지급할 식량 지원이 원화의 가치 절하가 실행되는 시점에 맞춰 진행될 것이라고 발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하였다. [중략] 한국 정부의 환율 인상 조치가 중요한 계기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원화의 가치절하만으로 저절로 수출이 증가하는 것은 아니었다. [중략] 당시 한국 정부는 일제 총독부가 실시하였던 정책과 미국의 경제 전문가가 권유하는 정책을 혼합하여 독특한 수출 정책을 채택하고 있었다. 일제 총독부가 추진하던 것과 유사하게 수출을 장려하기 위해서 일부 특정 기업에게 세금 감면, 철도 수송 비용 감면, 은행 대출이자율 특혜 등의 혜택을 부여했던 것인데, 이 중에서도 은행 대출 이자율 감면 혜택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자율 감면 혜택을 받았던 기업 중에는 오늘날 세계적인 대기업으로 성장한 삼성과 현대도 포함되어 있다. 이 기업들은 정부로부터 특혜를 받는 대가로 공화당에 거액의 정치자금을 제공하였다.[대한민국 만들기 1945~1987, 그렉 브라진스키 지음, 나종남 옮김, 책과함께, 2012년, pp245~247]

내용을 살펴보기에 앞서 먼저 인용한 이 책의 독특한 지형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 책의 일관된 기조는 대한민국이, 미국이 다른 나라에서 공산세력의 위협을 막고 자신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이식하려 했던 많은 시도들 중 가장 성공적인 나라였다는 주장이고, 이를 위해 이승만 이후부터 1987년까지의 미국 사회와 한국 사회의 상호역학관계를 다루고 있다.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에 대한 전문가인 저자는 스스로도 자신이 이 책에서 제시하는 주장과 해석에 대해 “우파와 좌파 모두 불만을 표시할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우파는 독재정권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좌파는 미국의 역할에 대한 긍정적 시각을 싫어할 것이라는 짐작이었다.

책 내용은 그의 염려가 기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톤을 유지하고 있다. 전반부에서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거의 좌파적 시각의 글이라 여겨질 정도로 평가가 혹독하다. 미국의 원조를 경제개발에 힘쓰기 보다는 자신의 권력 강화에 몽땅 쏟아 부은 냉혹한 독재자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대체재가 없다는 이유로 그의 독재를 용인하지만 지식인, 군인들에게 미국식 자유주의의 우월성을 전파하여 독재종식에 기여했다는 서술은 좌파의 구미에 맞지 않는 묘사다. 박정희로 가서는 그의 독재자로서의 모습과 열정적인 경제 지도자로서의 모습이 중첩적으로 서술된다. 그리고 인용문에도 그러한 이중적인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인용문에 나온 원화의 가치절하 조치는 1964년의 조치다. 1961년의 쿠데타를 통해 출범한 신생정부는 잘 알다시피 미국의 정권에 대한 승인과 원조가 없이는 유지될 수 없는 정부였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의 경제적 원조뿐만 아니라 정치적, 정책적 지원에도 크게 기대고 있었다. 이러한 사유로 박정희는 집권 즉시 미국이 원하던 일본과의 재수교, 월남파병, 환율조정 등을 차근차근 실천해 나간다. 이 중 원화의 가치절하는 상기의 사유로 박 정권이 전면적으로 단행한 조치다. 지금 와서 보면 가치절하 이외에 다른 대안이 많지 않았기에 그의 결정이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묘사된 정황만 보더라도 그 진행은 일방적이고 민중 수탈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지난 번 글에서 박승 前 한국은행 총재가 박정희의 경제개발을 “인플레를 유발할 뿐 아니라 인플레를 활용하는 방식의 경제개발”이라고 묘사했던 바, 위와 같은 조치는 그러한 경제개발의 일환이다. 즉, 박정희는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임으로써 인플레이션을 방기하는 차원을 넘어 조장한 것이다. 이승만이 원화 가치를 낮추라는 미국의 조언을 무시했던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이는 수입품 가격을 앙등시키고 수출업자와 채무자에게는 유리한 환경을 조성했다. 더 나아가 수출기업에게는 금리를 깎아주는 등의 특혜를 주었으니 삼성과 현대와 같은 기업으로서는 이중, 삼중의 특혜를 누린 셈이다.1 그리고 우리경제는 수출주도 경제 또는 “박정희 체제”를 공고화하게 된다.

박정희 정권의 “인플레적인 경제개발” 정책

셋째로 인플레적인 경제개발이었다는 점이다. 인플레적인 경제개발이라 함은 경제개발이 인플레를 유발할 뿐 아니라 인플레를 활용하는 방식의 경제개발이라는 것이다. 돈을 찍어 내자를 공급함으로써 투자는 인플레를 유발하였다. 한편 인플레가 되면 채권자와 예금자는 손실을 보고 채무자와 대출받은 자는 득을 보게 되어 은행돈으로 공장을 세운 대기업들의 빚을 탕감해주는 작용을 한 것이다. 그래서 경제개발과정에서 줄곧 높은 인플레가 지속되었는데 이것은 서민가계는 압박하고 기업은 혜택을 주는 작용을 한 것이다.[하늘을 보고 별을 보고, 박승, 한국일보사, 2010년, p135]

한국은행 총재를 지낸 박승 씨의 회고록 중 일부다. 인용한 부분은 박정희 군사정권의 개발정책의 특징을 정리한 내용 중 일부다. 박승 씨는 크게 네 가지 특징을 들었는데, 첫째, 개방체제의 이익을 최대한 추구하였다는 점, 둘째, 정부 주도적 성장이라는 점, 셋째, 인플레적인 경재개발이라는 점, 넷째, 불균형적인 성장이라는 점 등이 그것이다.

요약한 문구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군사정권의 경제정책은 첫째 정책을 제외하고는 우리가 알고 있는, 소위 “자유주의”적 경제개발 노선과는 많이 동떨어진 노선이다. 즉, 정부 주도 하에 산업별 혹은 지역별로 불균형적인 – 또는 불평등한 – 자원분배를 통해 경제성장을 유도하였는데, 이를 다시 고의적인 인플레를 통해 결과물도 재분배한 것이다.

오늘날 기업의 부채비율은 매우 낮다. 일례로 주식시장에 상장된 기업 중 164개사의 2012년 상반기 실적자료를 보면, 이들 기업의 부채비율은 135.05%였다. IMF외환위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기업의 부채비율은 이보다 훨씬 높은 수준이었고, 그러한 부채비율은 기업에 대한 이른바 “특혜금융”을 통해 자금이 대출되고 유지되면서 가능한 일이었다.

특히 특혜금융은 한국, 대만, 일본과 같은 “동아시아 모델”의 특징인, 국가의 금융적 통제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었다. 특히 한국과 대만은 국가가 은행을 직접 소유함으로써 그 통제력을 가질 수 있었다. 인플레이션이 심해지면 채권자는 손해를 보는데, 채권자인 은행이 곧 국가이므로 이에 대한 거부감은 거시적 측면에서 완화될 것이었다.

물론 이런 고의적인 인플레이션을 통한 경제통제 내지는 경제조작은 아주 오래된 풍습이다. “인플레이션은 우연한 사고가 아니라 권력층에 의해 조작되는 것”이라는 주장이 있을 정도로, 인류의 역사는 또한 인플레이션의 역사이기도 했다. 역사상의 권력들은 수시로 자신이 진 빚을 탕감하기 위해 인플레이션을 방임 내지는 유발했다.

이러한 역사적인 무정부 상태를 통제하고 상호신용을 강화시키는 강한 수단 중 하나가 금본위제인 셈이다. 이마저도 결국 실패로 돌아가 오늘날은 허술한 달러본위제가 이어지고 있지만, 어찌 됐든 신생 남한의 군사정권은 과거의 역사를 교훈삼아, 개방경제를 취하면서도 인플레이션 유발을 통해 불균등한 자원배분을 유도한 것이다.

그 결과, 1960년대 한국 경제는 외자와 은행대출을 얻기만 하면 큰 이익이 되는 것이란 풍토가 만연했다. 은행대출에 관한 부정사건이 줄을 잇고, 대기업은 과다부채와 과잉투자로 인해 부실화로 이어졌다. 60년대 말 정부는 상황을 개선시키려 했으나 효과가 미약했다. 박정희는 1972년 8.3사채동결조치로 다시 기업의 부채를 탕감시켜줬다.

특별인출권(special drawing right)의 탄생 과정

처음에 미국은 달러의 기축 통화 역할을 축소할 수 있다는 우려에서 특별 인출권과 같은 수단을 만드는 것에 반대했다. 1964년 IMF 연례총회에서 달러의 비대칭적 위상을 반대하던 프랑스는 그러한 수단을 만들자고 제안했으나 미국에 의해 좌초되었다. 드골은 이에 굴하지 않고 국제 체제의 대칭성을 회복하기 위해 남은 유일한 길로서 금본위제로의 복귀를 제시했고 프랑스중앙은행은 달러를 금으로 급히 교환했다. 이러한 은근한 협박은 미국의 공식 입장을 변하게 만들었다. [중략] 미국은 미국의 대외 통화 위상이 더 이상 난공불락이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고 1965년에 입장을 바꿔 특별 인출권 창출에 동의했다.[글로벌라이징캐피털, 배리 아이켄그린 지음, 강명세 옮김, 미지북스, 2010년, p178]

국제 통화 체제에서의 프랑스의 역할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서구강국이긴 하지만 통화 체제나 금융 체제에서 선두주자가 될 가능성이 낮은 나라, 그렇기 때문에 강대국들 간의 모임에서도 반골(反骨)의 스탠스를 유지하고 있는 그런 나라가 프랑스다. 프랑스의 이러한 입장이 어떤 경우에는 제3세계의 입장과 동일한 선상이기도 하였지만, 많은 경우 그 반발의 동기는 결코 1인자가 될 수 없는 2인자의 앙탈 같은 느낌이 강하다. 1차 대전 이전에는 영국에, 브레튼우즈 체제 하에서는 미국에, 그리고 유로존의 위기 중에는 독일에게 각각 들이대는 “영원한 2인자”.

5.16과 金星

금성은 58년 후반기에 락희 연지 공장 옆에 부지를 마련하고 공장 건설에 착수하는 한편, 독일인 헨케를 판매이익의 2%를 준다는 조건으로 지사장의 자리에 앉혔다. [중략] 59년 11월, 최초로 생산된 국산 1호 라디오는 전기용 단파 5구 1밴드 형이었다. [중략] 외제의 산뜻한 외관과 좋은 성능에 입맛을 들인 고객들은 금성 기술진의 감격을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의 제품을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당시엔 배터리로 들을 수 있는 성능 좋은 외제 라디오가 피엑스에서 마구 쏟아져 나와 범람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략] 그 후 금성은 선풍기와 전화기 등을 내놨지만 별 재미를 못 보다가 61년 5.16이 일어나면서 하늘의 별을 딴다. <특정 외래품 판매 금지법>이 제정되면서 <농어촌 라디오 보내기 운동>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 변화로 금성은, 죽어가던 나무에 새 잎이 돋고 꽃이 피어나듯, 승승장구하게 된다.[재벌들의 전자전쟁, 오효진 저, 나남, 1984년, pp18~19]

Material Girl 을 듣다가 생각난 서구의 80년대

어떤 소년들은 내게 키스하고 어떤 소년들은 껴안는데
뭐 괜찮아.
만약 그들이 적당한 신용을 제공하지 않으면
그냥 떠나버리면 돼.
Some boys kiss me, some boys hug me
I think they’re O.K.
If they don’t give me proper credit
I just walk away
(Madonna – Material Girl)

유난히 천진난만한 코맹맹이 목소리로 신용거래를 통해 창출되는 애정관계를 묘사한 마돈나의 명곡 Material Girl. 마돈나는 “우리가 물질적인 세계(material world)에서 사는 것을 알지 않느냐”면서 “난 물질적인 소녀야”라고 선언한다. 이 노래는 그녀의 가장 많이 팔린 앨범 중 하나인 Like A Virgin의 수록곡이다.

이 앨범이 발표된 1985년의 미국은 마돈나가 이야기한 바대로 물질적인 분위기가 충만할 때였다. 이 시기, 대통령은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이었고, 경제는 활황세였기에 말 그대로 “돈이 말을 하는” 시기였다. 당시 분위기는 이 시절을 배경으로 한 영화 ‘미국의 싸이코(American Psycho)’에 잘 표현되어 있다.

넌 네 자신이 커다란 자동차의 운전대 뒤에 있는 것을 발견할지도 몰라.
넌 네 자신이 아름다운 집에서 아름다운 아내와 있는 것을 발견할지도 몰라.
넌 이렇게 자문할지도 몰라. 음, 내가 여기 어떻게 왔지?
You may find yourself behind the wheel of a large automobile
You may find yourself in a beautiful house with a beautiful wife You may ask yourself, well, how did I get here?
(Talking Heads – Once In A Lifetime)

바로 이 질문에 대해서 유머러스한 경제학자 사트야지트 다스는 ‘부채’덕분에 그게 가능하다고 말했다. 흠~ 아닌 게 아니라 그래프를 살펴보니 마돈나가 “난 물질적인 소녀야.”라고 외치고 있던 시점에, 미국의 싸이코가 친구의 명함이 자기 명함보다 더 고급스럽다는 사실에 눈썹이 떨리던 시점에 미국의 빚이 급증하고 있다.

그렇다면 마돈나를 껴안으려는 소년이 제공하는 신용이나 싸이코가 만든 고급 명함의 재원은 바로 빚을 통해 조달한 것이 되는 셈인가? 아마도 그럴 것이다. 이때쯤이면 미쏘 대결구도에서 강경노선을 택한 레이건은 군비확장을 위해 빚을 늘렸고, 소련의 패배가 확실해진 일극(一極)체제에서 미국은 더 거침없이 빚을 늘렸다.

이렇게 빚이 는다고 모두가 그 혜택을 누린 것은 아니다. 당시는 영미권에서 보수정권이 들어서면서 이전의 온정주의적 태도를 버리고 노동자들을 살벌하게 길거리로 내쫓던 시기였다. Fed 의장인 폴 볼커는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금리를 살인적으로 올려 채무자들의 주머니를 탈탈 털어냈다. 서민의 삶은 더 힘들어졌다.

당신은 공공의 적인 10번지(다우닝가 10번지인 영국 수상관저)에 의해 위협받게 될까요?
파워게임을 하고 있는 그들.
당신의 임금인상은 없다는 소리를 들을 때
그들은 잉여를 취하고 당신만 책임을 집니다.
Are you gonna be threatened by
The public enemy No. 10
Those who play the power game
They take the profits -you take the blame
When they tell you there’s no rise in pay
(The Style Council – Walls Come Tumbling Down)

패션 스타일에 있어서는 거품이 생겨나는 경제를 대변하기라도 하듯 풍성하고 과장된 스타일이 유행했다. 머리는 한껏 치켜 올려 세웠고, 어깨선에도 과장된 디자인이 적용됐다. 대중음악들도 마돈나의 노래처럼 화려하고 거침없고 빠른 템포의 춤곡이 인기를 얻었다. 화장을 한 남녀들이 저마다의 미모를 뽐냈다.

이제 현대 자본주의에서 그런 시절이 다시 올까? 경기순환론을 믿는 이라면 사회의 생산력을 배가시킬 수 있는 어떤 혁신을 통해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 믿을지도 모르겠다. 만일 그런 시기가 다시 온다면 사람들은 이전에 얻은 교훈을 통해 보다 현명한 경제활동을 할까? 아니면 다시 한 번 “난 물질적인 소녀야”라고 외칠까?

그렇지만 내 희망을 봐. 내 꿈을 봐.
우리가 쓴 현찰들.
(오~) 난 당신을 사랑해. 오~ 당신은 내 월세를 내주지.
(오~) 난 당신을 사랑해. 오~ 당신은 내 월세를 내주지.
But look at my hopes, look at my dreams
The currency we’ve spent
(Ooooh) I love you, oh, you pay my rent
(Ooooh) I love you, oh, you pay my rent
(Pet Shop Boys – R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