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읽은 책들 단평

진정 회개할 곳은 교회다

스스로가 목사인 저자 권영진 씨가 한국 개신교계의 문제를 내부자의 시각에서 바라본 책. 그는 성경을 근거로 하여 한국 개신교계가 어떻게 성경을 편의적으로 해석하였는지, 그리고 이를 통해 교회의 일탈을 정당화하고 있는지를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비인간성에 대안을 제시해야 할 교회가 가장 “자본주의”적이 된 오늘날의 한국교회의 현실을 좀 더 선명하게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책.

정의란 무엇인가?

“인문학 책은 안 팔린다”는 통념을 깨부순 베스트셀러. 그 광풍이 지나가고 먼지가 가라앉은 즈음에 읽었다. 왜 그렇게 인기가 있었는지 충분히 이해가 될 정도로 흥미로운 주제를 솜씨 있게 엮어낸 수작. 다만 날선 이념적 대립이 여전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계급갈등에 대해서는 애써 피해가려는 의도가 보이기도 하는 점이 아쉽다. 센델이 말한 “연대적 의무”에서 연대의 당사자들에 대한 고찰이 더 필요하다.

사모펀드의 제왕 : 블랙스톤 그룹과 슈워츠만 이야기

현대 자본주의의 중추적인 투자행태가 된 프라이빗에쿼티 중에서도 걸출한 플레이어가 된 블랙스톤에 관한 이야기. 인사이더들이 읽어도 도움이 될 정도로 펀드의 성장에 관한 밀도 높은 이야기들이 잘 서술되어 있다. 이런 정도의 취재력과 날카로운 시각을 유지하는 서적이 발간된다는 상황이 부럽기도 하다. 다만 긴 역사를 책 한 권에 풀어내다보니 후반부 들어 조금 지루해지는 감도 있다.

적군파 내부 폭력의 심리학

학생운동이 왕성했던 1960년대의 일본, “자본주의를 파괴하기 위해서는 군대가 필요하다”는 신념하에 결성된 조직이 적군파다. 좌익세력 내에서도 소수였던 이들이 공안의 탄압을 피해 산으로 피신하고 벌어진 일은 상상을 초월하는 자기 파괴적 행위.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는지를 사회심리학적인 관점에서 바라본 책.

사볼타 사건의 진실 v.264

1920년대 ‘사볼타’라는 한 무기회사에서 벌어지는 파업 사태를 둘러싸고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사랑하고 증오하고 반목하는 관계를 그린 소설. 추리소설의 형식을 취한 소설은 누군가의 법정증언, 1인칭 시점의 독백 등을 시간상으로도 앞뒤로 뒤섞어 서술하면서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다. 계급상승을 꿈꿨던 한 가난한 젊은이의 삶이 구차해보이기도 하고 불쌍해 보이기도 한다. 나라면 어떻게 행동했을지 생각하게 만들던 상황.

이상호 기자 X파일 : 진실은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삼성 재벌이 정치권을 휘어잡기 위해 꾸몄던 음모가 담긴 육성녹음 파일이 있었고, 이를 보도하기 위한 한 기자의 외로운 싸움이 있었다. 자본이 정치를 지배하는 사회에서의 외곬수가 그 자본에 대항하여 어떻게 싸워왔는지에 대한 기록. 결과는 절반의 승리? 또는 또 다시 평안한 일상? 이 사건은 이건희, 이상호, 노무현, 노회찬 등의 인물들을 엮으며 현재진행형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 와중에 안철수 국회의원 탄생.

백은비사 : 은이 지배한 동서양 화폐전쟁의 역사

서양의 시각, 금(金)의 시각으로 서술됐던 경제사를 동양의 시각, – 사실은 다분히 중국의 시각이지만 – 은(銀)의 시각에서 다시 바라본 책. 유럽의 금융발전, 주식회사의 탄생, 중국의 제조업, 유럽의 남미 수탈, 금본위제, 아편전쟁 등 굵직굵직한 사건들 속에서 은(銀)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촘촘히 알려준다.

공공서비스, 불평등 심화, 그리고 “연대적 의무”

미국인의 삶에서 불평등 심화를 걱정하는 더 중요한 세 번째 이유는, 빈부 격차가 지나치면 민주 시민에게 요구되는 연대 의식을 약화시킨다는 사실이다. [중략] 상류층 지역에서는 경찰에 의존하기보다는 사설 경비업체와 계약한다. 자동차도 한집에 두세대가 되다보니 대중교통을 이용할 필요가 없어진다. 이처럼 부유층이 공공장소나 공공서비스를 이용하지 않게 되면서, 그것들은 달리 대신할 수단이 없는 서민들만의 몫이 되어버린다.[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이창신 옮김, 김영사, 2010년, p368]

마이클 센델의 베스트셀러 – 한국에서 인문학 서적의 돌풍을 일으킨 –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사회의 불평등 심화가 가지는 핵심적인 문제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유사 이래의 위대한 철학자들이 더 좋은 사회을 위한 시민의 도덕적 책임의 세 범주들, 즉 “자연적 의무”와 “자발적 의무”에 덧붙여 센댈과 같은 “공동체주의자”들이 주장한 “연대적 의무”가 부의 불평등으로 말미암아 희미해지는 상황을 묘사한 구절이다.

공공서비스는 실제로 자본주의 물질문명의 비약적인 발전에 결정적 기여를 한 재화이자 서비스다. 고속도로, 철도, 항만, 학교, 경찰, 군인 등의 인프라스트럭처 및 각종 서비스들은 사회가 발전하면서 필연적으로 늘어날 수밖에 없는 집합소비재에 대한 소요/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국가가 제공한 재화 및 서비스다. 이러한 재화/서비스는 지난 시절 시장에서 공급되기 어려운 제약조건 때문에 주로 국가가 공급해왔다.

덕분에 우리는 우리의 전 세대가 지불한 도로를 이용해 자동차 여행을 즐기고, 치안의 보호를 받고, 공립학교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는 우리가 도덕적 행위자로서 도달하는 방법론으로 “서사”라는 개념을 제시했다고 센델이 말하고 있는데, 이런 공공서비스에서도 일종의 서사의 개념이 적용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 세대는 전 세대의 땀으로 만들어진 공공서비스를 이용하였고, 이에 따라 유사한 공공서비스를 다음 세대에 물려줄 “연대적 의무”가 발생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이런 “연대적 의무”는 희미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가장 우선적으로는 공공재정의 위기다. 이로 말미암아 많은 공공서비스는 민영화/사유화되었는데 여기에서 강조되는 것은 오염자부담원칙(polluter pay principle)이다. 개인적으로는 무임승차를 방지하기 위한 효율적인 방편으로 지지하는 바이지만, 역시 다음 세대에게 빚을 떠넘긴다는 점에서 고유의 “연대적 의무”에서는 멀어지고 있다.

공공서비스에 대한 “연대적 의무”는 美민주당의 진보적 투사로 떠오르고 있는 엘리자베스 워렌이 한 가정집에서 했던 연설에서 잘 설명되고 있다. 그는 그 연설에서 자본가들이 “우리가 낸 세금으로 만든 도로로 운송”해서 돈을 벌었으니 “다음 세대를 위해 내놓는 것이 사회의 암묵적 계약이 아니었냐”고 묻고 있다. 탈세와 이로 인한 공공재정의 위기를 질타한 이 연설에서 그는 서사적인 “연대적 의무”를 잘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의무감의 퇴색은 센델이 지적하는 것처럼 동시대의 소비영역에서도 진행되고 있다. 경찰기능이 완전 민영화된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 많은 이들이 사설경찰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다. 자동차가 늘어나면서 대중교통 확충보다는 기름 값 추이에 더 신경을 쓰는 형편이다. 실제로 런던에서는 한때 부자동네 의회가 시의 지하철 확충에 자신들의 돈을 내지 못하겠다고 우긴 적도 있었다. 부의 편중에 따른 의무감 퇴색의 전형적 예다.

이러한 관점을 아까 올린 목동의 사례로 보면 흥미로워진다. 학교라는 공공서비스가 – 사립학교라 할지라도 여전히 공공적 기능이 있다 – 목동에 위치하면서 주민들은 교육 혜택을 누려왔다. 여러 요인에 의해 “귀족 학군”으로 분류되며 집값 상승이라는 부수적 효과도 거둔다. 이 과정에서 주민들은 교육을 “목동 학군”의 일종의 사적재(私的才)로 향유하려는 욕망이 생겼다. 저소득층과 그 사적재를 나누기가 싫다고 한다.

요컨대 물질문명의 발달에 따른 재화/서비스 공급방식을 보면 대개의 자기서비스(self-help)가 주를 이루었고, 사회가 발달하면서 정부에 의한 공공서비스의 공급이 활성화되다가 이제 여러 서비스들이 분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다시 사적재와 공공재가 분화되는 길을 걷고 있다. 이 과정에서 공동체의 서사적인 연대의식은 희미해져가고 있다. 또는 심지어 특정 공공재를 사적재나 되는 것처럼 착각하기까지 한다.

행복주택 때문에 “패닉”상태라는 동네 이야기

“목동 사는 이유가 학군 하나 때문인데, 이제 집값 떨어질 일만 남았죠.” 행복주택 시범지구로 목동 유수지(홍수량의 일부를 저수하는 곳)가 정해지면서 목동주민들이 손사래를 치고 있다. 목동지구가 다른 지역보다 행복주택에 대한 반발이 심한 이유는 학군 때문이다. 행복주택이 목동에 들어설 경우 이들 원주민과 상대적으로 소득이 적은 행복주택 입주민들의 자녀가 함께 학교에 배치돼 학군이 나빠질 것이란 우려가 나오고 있는 것. 결국 학군 때문에 목동을 선택하려는 수요자들이 줄어들어 목동 특유의 학군 프리미엄도 그만큼 희석될 수 있다는 얘기다.[행복주택 이웃될 13억원 하이페리온 주민들 패닉]

“행복주택”은 박근혜 정부가 서민의 주거안정을 위해 새로이 시작하는 임대주택 사업이다. 정부의 목표는 “대중교통이 편리한 철도부지와 도심 유휴부지를 활용해 5년간 총 20만 가구를 공급”하는 것으로, 이번에 인용한 기사의 사업부지를 비롯하여 행복주택 시범지구를 7곳 선정하였다. 목동 유수지는 대중교통이 편리하고 도심 유휴부지를 활용했다는 점에서 정부의 목표에 잘 부합하는 사업부지로 여겨진다.

문제는 해당 입지가 자연스럽게도 기사의 인터뷰 내용처럼 기존 주거지역과의 소위 사회적 갈등을 야기할 가능성이 높은 입지라는 점이다. 기사제목의 천박함은 별도로 하더라도 저 정도의 정서가 기존 주민들의 마음속에 어느 정도는 자리 잡고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처음부터 임대주택의 “소셜믹스”가 의무화된 단지도 아니고 나름 고급 아파트의 거주민으로서 기득권이 있다고 여겨 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전에 소셜믹스 단지에서 임대주택 거주민을 격리시키려는 시도에 대해 개탄한 바 있고 이 기사를 트윗하면서도 좀 거칠게 비난했지만, 경제적인 관점에서 좀 더 냉정히 들여다 볼 필요는 있을 것 같다. 목동은 기사에서도 언급하고 있듯이 집값에 “학군 프리미엄”이 상당한 동네다. 소셜믹스 단지처럼 임대주택의 입지가 애초에 주어진 조건도 아니었다. 이 둘이 결합하면 원주민으로서는 억울하기도 할 노릇이다.

이를 경제학 용어로 표현하자면 임대주택이 들어서면서 일종의 “부(負)의 외부효과”가 예상되는 상황인 것이다. “하이페리온의 경우 전용면적 158㎡의 시세는 13억원 수준”인 고급 아파트 지역에 저렴한 임대주택이 들어서고 이들 거주민의 자녀가 같은 학교에 다니게 되면 “귀족 학군”의 이미지가 흐려져 집값의 하락이 예상되고, 교통상황도 악화되는 등 외부불경제가 발생할 개연성이 있는 상황인 것이다.

이런 유의 외부불경제가 집값에 악영향을 끼친 것에 대해 손해배상의 정당성을 인정한 대표적인 사례가 조망권 침해 사례일 것이다. 일조권 등 정서상 기본적인 권리라 여겨지는 권리에서 한발 더 나아가 조망권이라는 약간은 “여유로운 소리”로 여겨질 수도 있는 권리가 법적으로 인정받은 셈인데, 그런 판결이 나온 것은 법원이 조망권 덕분에 소송인들의 집값에 프리미엄이 붙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바로 앞에 세워진 아파트 때문에 한강이 바라보이는 조망권이 침해됐다면 아파트 건설사가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이 나왔습니다. [중략] 재판부는 한강 주변 아파트의 경우 조망이 가능한지 여부나 정도에 따라 수억원까지 프리미엄이 붙는 등 조망권이 아파트의 사회적/경제적 가치를 크게 좌우한다고 봤습니다. [중략] 이번 판결을 내린 재판부는 조망의 이익은 항상 법적으로 보호받을 가치가 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한강처럼 특정한 장소가 조망에 있어 특별한 가치를 갖고, 사회관념상 독자적 이익을 볼 수 있다면 법적으로도 보호돼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한강 조망권 침해 첫 배상판결]

그렇다면 “조망권 프리미엄”처럼 “학군 프리미엄”도 법원에서 유사한 판결을 받을 수 있을까? 나는 정서적 이유와 실용적 이유에서 어려울 것이라 생각한다. 학군 피해자는 조망권 피해자와 달리 저소득층과 섞이기 싫다는 이기주의자란 비난을 받을 가능성이 많다는 점이 정서적 이유다. 학군 프리미엄의 경제적 영향은 조망권 프리미엄에 비해 원인결과가 모호하고 장기적이어서 가치의 측정이 어렵다는 점이 실용적 이유다.

아파트란 주거양식이 한국에 뿌리내린 이래 비슷한 경제적 지위를 가진 이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고, 그럼으로써 사회적 네트워크가 형성된다는 사회계층 분리효과는 암묵적으로 인정되는 바다. 그럼에도 이런 상황이 집의 경제적 가치를 더 높였다는 주장은 정서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또한 설사 그렇다 할지라도 그러한 정(正)의 외부효과를 조망권처럼 “특정한 장소의 특별한 가치”로 측정하는 것은 매우 어려울 것이다.

그들이 정말 행복주택 때문에 경제적, 사회적 피해를 입을 것이라 여겨진다면 장기전세주택을 주민반대로 좌절시킨 양재동 주민들처럼 반대운동에 나서든지, 국토부로부터 반대급부를 받든지 하는 것이 현실적 대안일 것이다. 하지만 어떤 대안일지라도 “그들”과 섞이기 싫다는 정서를 무마시키기는 어려울 것이다. 아파트란 주거형태가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것이니 말이다. 게다가 무려 “13억 원짜리 하이페리온”이다.

투자대상으로서의 남한교회에 대한 단상

그 후 1990년대 말이 지나면서 교회가 정체되고 성도 수의 성장이 둔화를 넘어 하향세로 돌아서자 교회성장론은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됩니다. 그것은 마케팅과 자본주의 논리의 도입입니다. 이것을 가장 극적으로 도입하고 성공한 사례가 빌 하이벨스(Bill Hybels) 목사의 윌로우 크릭 교회(Willow Creek Community Church)입니다. 자신의 교회가 속한 곳의 지역주민들을 분석하고 그들의 취향을 파악하여 거기에 알맞은 홍보 전략을 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한국 같은 경우는 자신들의 교회에 한 명의 성도라도 더 끌어 모으기 위해 소위 말하는 총동원 주일 등의 행사를 통해 경품과 많은 실적(?)을 올린 성도들에게 시상을 하는 해괴한 짓들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다른 교회에 멀쩡히 다니고 있는 사람들도 자기 교회로 데리고 오는 짓들을 하기 시작합니다.[진정 회개할 곳은 교회다, 권영진 지음, 리북, 2011년, pp171~172]

스스로가 목사이신 권영진 씨의 한국교회에 대한 쓴 소리를 담은 책의 일부다. 대형화, 자본주의화, 세속화, 정치화의 길을 걷고 있는 한국교회의 현황을 내부자의 입장에서 차근차근 비판하고 있다. 여러 주제들이 마음에 와 닿지만 어디까지나 국외자인 내 입장에서는 – 특히 최근의 나 – 이 인용문에 공감이 간다. 바로 연휴 3일 동안 “총동원 주일”에 동원된 듯한 전도사들로부터 시달려야 했기 때문이다.

지난 3일 간 수명의 전도사들이 우리 집 벨을 눌렀다. 처음 얼마간은 “누구세요?”라고 응답하며 일없으니 가보라고 조용히 이야기했지만 요즘은 그마저도 귀찮아 아내와 나는 인터폰의 비디오를 슬며시 본다. 택배 노동자 차림이 아닌 낯모르는 이들이 있으면 십중팔구 이들 전도사다. 연휴기간 역시 아내와 나는 조용히 비디오를 지켜봤다. 그들은 역시 예상대로 연휴 기간 동안 전도에 동원된 신도들이었다.

하필 석가탄신일에 그토록 유난스럽게 더 자주 전도를 다니는가에 대해선 의문을 제기하지 않겠다. 다만 중학생이 되었을까 할 정도의 어린 아이들까지 동원된 그 행동이, 조금만이라도 응답을 한다면 다른 사람들의 사적인 영역을 언제라도 침범하겠다는 스팸 메일과 무엇이 다른지 궁금할 따름이다. 또는 요즘 와서 그 폐해가 드러나 세력을 확장시키지 못하고 있는 다단계 판매와 뭐가 다른지 궁금할 따름이다.

이러한 전도활동은 자본주의化된 교회 주식회사의 활동일 따름이다. 그들이 나라는 특정 개인의 종교적 구원에 관심을 가지고 방문한 것이라면 문 앞에서 좀 더 기다리거나 다른 날 다시 와서라도 전도를 시도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 정확히는 그들을 보낸 교회는 – 나의 구원이 아닌 신도수의 양적증가에 관심이 있을 따름이기 때문에 내가 응답이 없자 미련 없이 다음 목적지를 향해 발길을 옮긴 것이다.

트위터에서 이런 경험에 대해 불만을 털어놓자 어떤 이는 자기 남편이, 집사 친구 때문에 “총동원 전도주일” 기간 동안만 그 교회에 가고 올해엔 경품으로 중국제 스테인리스 주방기구를 받아왔다고 한다. 앞서 말한 다단계 판매도 생각나고 어릴 적 친구를 학원에 데려오면 참고서를 공짜로 준다던 주산학원의 마케팅 전략도 생각난다. 중국제 스테인리스 주방기구에 그 분의 영혼을 얼마나 더 많이 구원받았을지 궁금하다.

물론 교회도 성장이 정체되어 있어서는 곤란할 것이다. 신도들이 편안하게 머물러야 할 적절한 공간도 마련하고 구휼활동도 할 돈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현재 남한의 개신교계의 성장욕구는 그 도를 넘어서고 있는 것 같다. 권영진 목사가 지적하고 있듯이 이 성장욕구는 자본주의 기업의 그것과 내용상으로 거의 일치하고 있다. 거기에 법인세를 납부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기업보다 더한 특혜를 받고 성장하고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남한교회야말로 사모펀드와 같은 투자자들이 노릴만한 투자대상으로 가장 적당한 자산이다. 소비자들은 콘텐츠에 대한 확신이 있고 스스로 새로운 소비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휴일노동도 불사한다. 경영자들은 정치권과 긴밀하게 연결돼있어 정치적으로 시달릴 가능성도 적다. 세금도 내지 않는다. 현재 투자의 장애요인은 자신이 자본주의 기업이란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정서적 거부감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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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동원 전도주일”로 구글링하여 발견한 이미지

신평사의 신용은 누가 어떻게 유지시킬 것인가?

해외 신용평가사로부터 신용등급을 받는 건설사가 자취를 감출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최근 GS건설이 해외 신평사의 신용등급을 받지 않기로 하면서 해외 신평사의 신용등급을 가진 국내 건설사는 포스코건설 단 1곳에 불과하다. 게다가 포스코건설의 신용등급도 국내보다 크게 낮은 탓에 해외 채권 발행이 여의치 않아지면서 해외 신평사의 신용등급 무용론이 불거지고 있다.[해외 신평사 신용등급 무용론 대두]

국내 3대 신용평가사들이 국내 기업에 대한 신용등급 고평가 현상이 여전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외국 신평사보다 평균 여섯 등급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는 평가기업이 내는 수수료가 주요 수익원인 신평사 입장에서는 경쟁사보다 낮은 신용등급을 부여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렵기 때문으로 분석되고 있다.[국내 3대 신평사, 신용등급 ‘뻥튀기’ 심각]

같은 신문에서 같은 날짜에 보도된 두 기사다. 한쪽은 해외 신평사의 지나치게 박한 신용등급을, 한쪽은 국내 신평사의 지나치게 후한 신용등급을 비판하고 있다. 쓴 웃음이 지어지는 상황이 아닐 수 없다. 기업이 초국적화되고 기업의 신용도를 바라보는 기준이 균일화되어 가고 있는 상황에서 국내 신평사와 해외 신평사의 눈높이는 사뭇 다르니 말이다.

그 이유는 다양할 것이다. 두 번째 기사에서 원인으로 들고 있는 평가받는 기업이 내는 수수료가 수익원이어서 신평사의 점수가 후할 것이라는 분석은, 물론 중요한 모순이긴 하지만 절반만 사실이다. 그게 주요원인이라면 역시 평가받는 기업으로부터 수수료를 받는 해외 신평사의 국내 기업에 대한 신용등급이 박한 이유는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해외 신평사가 국내기업에 대해 박한 이유로 공통적으로 들고 있는 이유는 컨트리 리스크다. 남북분단이라는 매크로 환경이 기본적으로 점수를 깎고 들어간다. 하지만 이 변수는 점차 덜 중요한 몫을 차지하는 것 같다. 해외에서 바라보는 더 중요한 매크로 환경은 이른바 한국 특유의 “재벌” 체제에서의 소유-경영의 불투명성에 따른 리스크인 것 같다.

흥미롭게도 국내 신평사는 오히려 이런 특수성이 높은 신용등급의 근거가 된다. 즉, 순환출자로 엮인 “재벌”社에 속해있는 계열사는 회사 자체의 능력보다 더 좋은 신용등급을 받는다. 신용 리스크 등이 불거질 경우 모기업에서 자금을 제공해줄 것이라는, 전혀 근거 없지는 않은 믿음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부실한 공사(公社)의 프리미엄도 상당하다.

국내 신평사가 외국 신평사보다 지나치게 높은 수준의 신용등급을 부여하는 것도 문제지만, ‘뒷북’ 신용등급 조정이 더 큰 문제라는 지적도 있다. [중략] 투자적격으로 분류됐던 LIG건설도 법정관리에 들어간 뒤에야 신용등급이 강등됐다.[국내 3대 신평사, 신용등급 ‘뻥튀기’ 심각]

이런 뒷북 신용등급은 주되게 국내 신용등급이 피평가기업이 갑인 상황에서 양산되는 “주례사식” 신용평가가 원인이겠지만, 그에 못지않게 관계기업이 뒤를 받쳐줄 것이라는 믿음이 그 평가의 근거가 된다. LIG건설이 바로 그 대표적 사례인데, 이 회사는 그룹이 지켜줄 것이란 시장의 믿음을 근거로 법정관리 바로 직전까지 회사채를 발행하기도 했다.

결국 이런 상황이니 그룹 계열사나 개발공사 등의 신용평가 레포트를 읽어보면 한심할 때가 많다. “현금흐름도 원활하지 않고, 부실사업도 많고, 우발채무도 만만치 않은데, 결론적으로는 모기업 혹은 국가의 – 암묵적이거나 명시적인 – 보증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A등급을 부여한다”는 식이다. 반(反)시장적 요소가 가장 시장적인 평가의 근거가 되는 장면이다.

알다시피 신용평가는 대공황 등 경제적 격변기를 거치며 그 평가의 객관성이 시장참여자의 의사결정에 도움을 준다는 사실이 역사적으로 검증되며 발달해 왔다. 이제 “신용”이라는 말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그 어느 단어보다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데, 지난 2008년의 위기를 “신용위기(credit crunch)”라 부른 사실에서도 그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다.

실물의 윤활유인 돈을 은행에서 제공한다면, 그 돈의 흐름에 대한 믿음은 신평사가 제공한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크다. 하지만 그 중요성에 비해 신용평가의 신뢰도는 점점 더 떨어지고 있다. 만일 은행이 제공하는 화폐가치가 신평사가 제공하는 신용처럼 들쑥날쑥하면 어떻게 될까? 아노미 상태가 될 것이다. 신평사의 신용은 누가 어떻게 유지시킬 것인가?

사모펀드는 기업 형태의 미래인가?

이러한 모든 투자 실적들을 묶어주는 공통점은, 주식시장과 기존 주주들의 압력으로 인해서 기술적인 개편이 불가능하거나 어려운 상황에서도 실제 실행할 경우의 결과를 블랙스톤이 꿰뚫어 보았다는 사실이다. 헤르베르크, 바니, 실버먼, 클라크 및 셀라니즈의 웨이드먼 사장 등 경영자들은 한결같이 “구조개편으로 장기 가치를 향상시킬 수 있더라도 회사가 상장회사이던 시기에는 현행의 이익 실적을 유지하라는 압력으로 인해서 사업구조를 변경하려는 시도가 장벽에 부딪혔다”라고 증언하였다. 사모투자 편드가 주주로 자리를 잡고 나면, 경영진들은 수년간에 걸쳐서 장기적으로 경영할 자유를 얻게 된다. 사모투자자들이 변화를 만들어내는 데 수반되는 위험을 수용하는 이유는 통제권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사모투자 펀드에 의해 소유되는 독립기업들은 잠재력을 더 많이 발휘하게 된다.[사모펀드의 제왕 블랙스톤 그룹과 슈워츠만 이야기, 데이비드 캐리/존 모리스 지음, 하영춘/김지욱/김규진 옮김, 2012년, 첨단금융출판사, pp437~438]

사모펀드 계에서 가장 유명한 펀드 중 하나인 블랙스톤과 그 펀드의 창업자이자 카리스마적 지도자인 스티븐 슈워츠만에 관한 일화를 담은 책의 일부다. 우리의 귀에 익숙한 사모펀드라 하면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 알려진 KKR, 외환은행을 인수했던 론스타, 한미은행을 인수한 칼라일 정도일 것이다. 블랙스톤 역시 사모펀드에 대해 어느 정도 관심이 있는 이라면 익히 들어봤을 거대규모의 사모펀드다.

사모펀드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을 것이지만, 현재의 영어표현으로는 PE(Private Equity)라는 표현이 일반화되어 있는 것 같다. 이들 사모펀드는 ‘병행자본시장’이자 과도적인 기업 소유 형태로 인식되고 있다(446p). 즉 파트너십이나 주식회사처럼 익히 알려진 기업 소유 형태와 병행하여 자본이 조달되는, 그러나 그 소유기간이 상대적으로 짧은 방식으로 인식되고 있다.

특히 이들 펀드는 소위 LBO라는 약칭으로 불리는 Leveraged Buyout 금융 기법을 사용하여 수익을 극대화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기업은 통상 자본과 대출로 구성이 되어 있다. 그런데 자본을 소유한 이들이 기업을 소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펀드는 이 주식을 인수함으로써 회사를 소유할 수 있는데, 이 과정에서 해당 주식의 인수에도 또 다시 대출을 일으켜 레버리지를 극대화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A펀드가 투자자로부터 10억 달러의 자금을 모집했다고 해보자. 이들 앞에 유망한 회사 5개가 있는데 각각 자본 10억 달러, 대출 20억 달러의 자산을 가진 회사다. 그러면 펀드는 각각의 회사에 2억 달러 씩만 펀드 자금을 투입하고 나머지 자본은 감자를 하고 다시 대출, 채권 등의 형태로 구조를 짤 수 있다. 펀드는 10억 달러를 투자하여 자산 150억 달러의 포트폴리오를 구성할 수 있다.

이러한 LBO를 주로 구사하는 사모펀드의 특성 때문에 그들의 소유기간이 상대적으로 짧을 수밖에 없다. A펀드는 각각의 회사에서 실질적인 부채비율은 1500%다. 그렇기 때문에 하루속히 현금흐름 창출 등의 방법을 통하여 투자액을 회수하고 나오는 것이 최선이다. 현금흐름을 조금만 개선하여 4억 달러의 배당을 시현한다면 ROE는 200%가 되기 때문에 소유기간이 길지 않아도 무리가 없다.

이런 본질적인 사모펀드의 특징이 오늘날에는 신용위기 등과 더불어 많이 누그러졌다고는 하나, 기본적으로 그들을 장기적 사업목표를 추구하는 기업집단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재투자하지 않는다면 죽은 것이다”라고 슈워츠만이 팀원들에게 강조한바 있다고 하는데, 이는 특정기업에 오래 머물러 있기보다는 수익을 시현하고 다음 목표를 향해가는 사모펀드의 습성을 연상케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상장기업이 주주들의 “현행의 이익 실적을 유지하라는 압력” 때문에 행동에 제약을 받고, 사모펀드로 인수되어 “장기적으로 경영할 자유”를 얻었다는 증언에는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면이 있다. 구조조정의 동기가 강한 것이 사모펀드일 개연성은 높겠지만, 그들 역시 레버리지를 끌어다 쓴 제약조건 하에서 CEO들이 장기적으로 경영할 자유를 주는 기간은 한시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모펀드가 이전의, 상대적으로 정체된 주식회사보다 의사결정을 신속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장점은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들은 확실히 더 위험을 수용하려는 속성이 강하고, 때로 그것을 위해 개혁적인 경영진과 우호적 관계를 맺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의 “과도적인 기업 소유 형태”의 본질이 가지는 한계는 여전하다. 그들이 바라는 현금흐름은 확실히 안정적이기보다는 초기에 수익을 시현하는 쪽이다.

주식인수를 통해 기존의 상장기업도 상장 폐지하는 것이 전문인 블랙스톤은 아이러니하게도 2007년 6월 뉴욕거래소에 자신의 주식을 상장했다. 이를 통해 블랙스톤은 다양한 사업 분야의 펀드들의 산발적인 집합체 같은 이미지에서 하나의 정점을 가진 거대기업집단과 같은 이미지로 바뀌었다. 하지만 이전의 기업과는 다른 모습인 것은 여전하다. 그들을 제조업 집단으로 부를 것인가 금융투자업 집단으로 부를 것인가?

자본주의는 사모펀드를 통해서 확실히 또 다른 기업형태의 도전에 직면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빨라진 경기주기만큼이나 기업의 손 바뀜도 빨라지고 있다. 초국적인 사모펀드, 국부펀드는 이전의 대기업이 가지는 엄청난 자금력을 사모 또는 공모의 형태를 통해 실현하고 대등하게 싸우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이전의 기업의 진화된 형태인가 아니면 퇴보적인 형태인가? 아직도 정치가와 노동자들은 어리둥절할 뿐이다.

서강학파?

정부와 금융권에서는 박근혜 대통령 성향에 맞는 ‘서강학파’ 인사가 오를 것이란 관측이 높다. [중략] ‘서강학파’이면서 박근혜 대통령의 씽크탱크인 김광두 국가미래연구원장도 하마평에 올랐다. 김 원장은 2007년부터 경제 공부모임을 주도해 박 대통령의 경제 과외교사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박 대통령과 인연이 깊다.[우리금융 '회추위' 출범… 차기 회장은 누구?]

우리금융지주회사의 회장 자리가 공석이 되면서 그 향후추이를 관측하는 기사가 이어지고 있는데 이 기사도 그러한 예측기사다. 내 흥미를 자극하는 것은 차기회장이 누구인가보다 기자가 사용한 “서강학파”라는 표현이다. 경제학이라는 학문이 반드시 외래에서 유입된 학문은 아닐지라도 우리가 배워왔고 현실에 적응하고 있는 이론이 거의 대부분 외래에서 유입된 현실에서, 과연 위와 같은 표현이 유효한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남 교수의 입각은 한국 현대사에서 경제관료 집단으로 서강학파의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서강학파는 철저한 성장론자로 분류되고 있다. 서구식 경제 근대화 모델을 토대로 대기업·중화학공업 중심주의적인 경제정책을 펼쳤으며 수출지상주의, 신성장 후분배 등을 통한 압축 성장을 꾀했다. 한마디로 업적 제일주의적인 경제정책이 서강학파의 특징으로 분석되고 있다.[한국의 경제를 움직이는 인맥 대해부 서강학파 VS 학현학파]

한 신문이 국내 경제학파의 계보를 분석한 기사에서 설명한 서강학파의 특징이다. 이렇게 쓰고는 있지만 기사 논조는, 해외유학파를 통해 외래 유입된 국내 경제학 사조에서 “OO학파”를 지칭할 만큼의 독자성과 사상적 동질성을 가진 학파가 있는 가에 대해 회의감을 나타내고 있고 나 역시 대체로 동의하는 바이다. 특히나 서강학파는 인용문에 언급된 남덕우 씨를 비롯하여, 관료로 활동한 이들을 묶어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들의 공통점이 있기는 하다. 선도적으로 해외 유학을 다녀왔다는 점, 서구의 주류경제학을 공부하였다는 점, 관료로 활동하면서는 성장위주/수출주도의 국가 개입주의적 경제정책을 펼쳤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어떠한 사상적 맥락에서의 공통점이라기보다는 유학을 통한 서구사상의 적극적 수용을 기회로 입각되었고, 이후 위정자의 통치철학을 충실히 따랐다는 행태적 공통점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한국 경제를 움직였던 인맥을 학파로는 인정하지 않은 경제학자들이 다수 존재하고 있는 것 역시 이 때문이다. 즉 이들 대부분이 지향하는 이론은 합리적 시장자율경제를 지향하는 신고전학파로 분류되지만 실제 적용하는 경제 원칙은 자율시장경제 원칙과는 거리가 멀었던 게 현실이었다는 분석이다. 경제평론가 이성태 씨는 “한국의 경제 인맥은 이론적 동질성에 의한 집단이 아니다”고 잘라 말한다. 하나의 이론 체계를 고집하는 학자집단이 아니라 친소관계에 의해 형성된 친목집단이라는 게 이씨의 주장이다.[한국의 경제를 움직이는 인맥 대해부 서강학파 VS 학현학파]

물론 이성태 씨의 독설이 지나치다고 여길 소지도 있겠지만 서강학파에 있어서만큼은 어느 정도 비난을 감수할만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대부분 신고전파 경제학 등 주류경제학을 공부하고 시장경제를 옹호하며 ‘국가개입 최소화’ 등을 역설했지만, 입각 이후에는 “성장주의적 근대화론자”로 바뀌었다는 공통점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출세 경로 상에서의 공통점이지 사상적 맥락에서는 오히려 이율배반적인 성격이 강해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남덕우 씨의 “정치 지도자가 정책 방향을 제시하면 거시적 이론 테두리에 두들겨 맞추는 테라노크라트 역할을 한 것에 불과”했다는 자괴감 섞인 발언에서도 정황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서강학파라는 호칭은 타인에 의한 꼬리표인지라, 당사자들로서는 지나친 한데 묶기 내지는 폄하가 억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시의 적절하게 다시 서강학파가 紙上에 언급되고, 이를 은근히 즐기는 이들이 있다면 여전히 비판도 유효한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