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 기계화, 개발주의 등에 대한 단상

그러므로 사회주의가 실현되는 사회는 어디나 적어도 지금의 미국만큼 고도로 기계화되어야 한다. 아마 그보다 훨씬 더 그래야 할 것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이 그리는 세계는 언제나 완전히 기계화된 세상이며 엄청나게 조직화된 세상이다. 그것은 옛 문명들이 노예에 의존하듯 기계에 의존하는 세상이다.[위건 부두로 가는 길, 조지 오웰, 이한중 옮김, 한겨레 출판, 2010년, p255]

스스로를 “민주적 사회주의자”라 자처한 조지 오웰이 한 진보단체의 의뢰로 1936년 쓴 르포르타쥬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의 일부다. 책의 전반부는 작가 스스로가 몸으로 체험한 노동자들의 삶을 묘사한 부분이고 후반부는 인용한 부분과 같이 영국에서의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현황과 이에 대한 날선 비판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웰이 잘 관찰하였듯이 확실히 그 당시의 사회주의자들은 기계화에 대한 낙관주의가 팽배해 있었다. 그들이 실현할 사회주의는 고도화된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기계화, 산업화를 최대한 극대화시켜 인간을 노동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것이라고 믿었다. 이윤동기의 제거는 오히려 이런 기계화를 더 촉진시킬 것이었다.

일례로 오웰과 비슷한 시기에 활약한 화가이자 공산주의자였던 페르낭 레제는 기계문명에 대한 그의 신뢰가 아예 그림에 투영된 경우다. 그는 사람의 몸통을 기계 플랜트의 배관을 연상시키는 형태로 그렸다. 이런 그의 경향에 대해 한 평론가는 큐비즘이란 단어를 재밌게 비틀어 튜비즘(Tubism)이라고 정의하기도 했다.

실제로 신생 소비에트에게 있어 기계화는 사회주의와 거의 동일시되었다. 후진적인 생산력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생산과 유통 과정은 기계화, 표준화, 집단화 되어야 했다. 각종 설비는 대규모로 지어져서 규모의 경제를 극대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 시스템에서 노동영웅이 탄생했고 목가적인 소농은 발붙일 틈이 없었다.

어떻게 보면 오늘날 많은 진보세력이 비난하고 있는 맥도날드 햄버거와 같은 패스트푸드도 이러한 기계화, 표준화에 대한 낙관주의를 사회주의와 공유하고 있다. 이전에 비효율적으로 만들어지던 음식들을 제조업 공정처럼 대량생산 체제를 갖추어 맛의 질을 일정수준으로 유지하면서 싸게 팔겠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오늘날 모든 산업에 이러한 획일적인 표준화를 적용하는 것은 스스로가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이들조차 상당수가 비판적인 시각일 것이다. 그렇기에 원전과 같은 개발주의적 산물에 대해 반대운동을 펼치고 있고, 슬로우푸드 운동과 같은 반성적인 소비운동이 일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확실히 이념적 지평을 넓혀 줄 것이다.

문제는 그러함에도 과연 삶의 모든 측면에서 기계화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오웰 역시도 이런 현실을 인정하고 있다. (어떠한 이념적 기반이건 간에) 개발주의 자체의 폐해를 비판하는 이들도 스스로의 삶에 미치는 개발주의의 수혜를 무시할 수는 없다. 원전 없는 세상을 꿈꾸는 와중에도 전기는 쓰고 있으니 말이다.

이에 대한 대안 모색을 위해 우선은 인간이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는 맹신을 버려야 할 것이다. 과거 소비에트 사회주의는 이런 맹신 속에 자연을 파괴했고, 자본주의 국가 역시 일상적으로 그렇게 하고 있다. 그리고 스스로 조금 더 비용을 감내할 자세를 갖춰야 한다. “지탱 가능한 발전”은 이전의 개발주의와 다른 비용을 요구 할 테니 말이다.

그러나 이런 마음자세를 바꾸고 개발주의를 청산하는 일이 과연 현 체제에서 가능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단순히 무슨 방송국의 캠페인으로 이러한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또한 이상주의자들의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도전도 애정 어린 시선으로 쳐다보지 않을 수 없다.

잡담

# 회사에서 인터넷 사용을 막아서 블로그에 쓸 거리를 찾는 일이나 쓰는 일이 무척 번거롭다. 단시간 내에 다시 인터넷 사용을 허용할 것 같지도 않아서 이런 상태가 좀 더 지속될 것 같다. 글도 데스크탑에서 써서 스마트폰으로 올리는 노가다로 올리고 있다. 진작부터 글의 質 저하를 느끼신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모쪼록 그러한 상황을 감안하시도록~

# 꼭 앞서 말한 이유에서는 아니겠지만 부쩍 책을 많이 읽게 되었다. 이런저런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점이지만 잘 알지도 못하는, 또는 섣부르게 아는 일에 함부로 판단을 하면 안 된다는 점. 최근 터키의 시민항쟁에 대한 과장되거나 조작된 말이나 사진이 인터넷에 떠도는 것에 대해서도 일종의 “방법론적 회의”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주말에는 기타 연습도 조금 피치를 올렸다. 워낙에 음악적 감각이 젬병인데다 연습할 시간도 많지 않아 진도는 잘 나가고 있지 않지만 그래도 몇몇 곡의 흉내는 내는 정도다.(다만 아내는 기타 대신 오카리나를 해보는 게 어떠냐고 권하고 있지만) 최근 연습한 곡은 Bryan Adams의 Heaven과 The Police의 Every Breath You Take.

# 진작부터 사용해보고 싶었던 theme을 이제야 적용하게 되었다. 이 theme을 적용하고 나서 Google Chrome에서 열면 한글이 깨지는 현상이 있어 사용하지 않다가, 어느 블로그의 글 덕분에 해결한 후, 사진을 몇 개 곁들여 지루함을 덜었다. 그 중 하나는 린든 존슨 대통령과 마틴 루터 킹 주니어가 함께 있는 사진. 린든 존슨이 인권법에 서명하는 장면이다.

# 최근 읽고 있는 책은 일본의 “사회파” 추리소설가로 알려진 마쓰모토 세이초의 초기작 “점(點)과 선(線)”. 시간적 배경이 1950년대인지라 오늘날로 봐서는 답답할 만큼의 극진전이 오히려 정겹다. “사회파” 소설가라지만 사회적 비판의 메시지는 없다. 아마 후기작에서 그러한 경향이 강화된 듯 하다. 소설은 전형적인 일본 추리소설로 나름 재미있다.

# 조지 오웰의 “위건 부두로 가는 길”도 함께 읽고 있다. 르뽀르타쥬의 형식으로 쓰여진 책으로 탄광노동자의 고단한 삶을 직접 함께 부대끼며 느낀 바를 적고 있다.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영국 노동자 계급의 상태”도 연상된다. 글 솜씨도 뛰어나고 관점도 훌륭해서 정말 재밌고 흥미 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몇몇 묘사에서는 육성으로 웃음이 터지기도~

# 지난 주말에는 켄 로치의 Angels’ Share를 봤다. 노동계급에 대한 애정이 넘치는 감독답게 이번에도 사고를 치고 집행유예중인 부랑아 로비의 삶을 다루고 있다. 우연히 뛰어난 후각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게 된 로비가 고단한 삶에서 벗어나는 모험기가 코미디 형식으로 그려지고 있다. 영화를 보고나면 제목이 가지는 중의적(重義的) 의미를 음미해볼 수 있다.

# 일본 증시가 연이어 폭락하면서 “아베노믹스”가 실패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물론 아베의 경제에 대한 관점이 이전 정권과의 차별성이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특정 정부가 – 특히 일본과 같은 내각제에서 – “OO노믹스”와 같은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있다. 일종의 편의에 의한 꼬리표라는 생각도 든다.

요즘 읽은 책들 단평

진정 회개할 곳은 교회다

스스로가 목사인 저자 권영진 씨가 한국 개신교계의 문제를 내부자의 시각에서 바라본 책. 그는 성경을 근거로 하여 한국 개신교계가 어떻게 성경을 편의적으로 해석하였는지, 그리고 이를 통해 교회의 일탈을 정당화하고 있는지를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비인간성에 대안을 제시해야 할 교회가 가장 “자본주의”적이 된 오늘날의 한국교회의 현실을 좀 더 선명하게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책.

정의란 무엇인가?

“인문학 책은 안 팔린다”는 통념을 깨부순 베스트셀러. 그 광풍이 지나가고 먼지가 가라앉은 즈음에 읽었다. 왜 그렇게 인기가 있었는지 충분히 이해가 될 정도로 흥미로운 주제를 솜씨 있게 엮어낸 수작. 다만 날선 이념적 대립이 여전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계급갈등에 대해서는 애써 피해가려는 의도가 보이기도 하는 점이 아쉽다. 센델이 말한 “연대적 의무”에서 연대의 당사자들에 대한 고찰이 더 필요하다.

사모펀드의 제왕 : 블랙스톤 그룹과 슈워츠만 이야기

현대 자본주의의 중추적인 투자행태가 된 프라이빗에쿼티 중에서도 걸출한 플레이어가 된 블랙스톤에 관한 이야기. 인사이더들이 읽어도 도움이 될 정도로 펀드의 성장에 관한 밀도 높은 이야기들이 잘 서술되어 있다. 이런 정도의 취재력과 날카로운 시각을 유지하는 서적이 발간된다는 상황이 부럽기도 하다. 다만 긴 역사를 책 한 권에 풀어내다보니 후반부 들어 조금 지루해지는 감도 있다.

적군파 내부 폭력의 심리학

학생운동이 왕성했던 1960년대의 일본, “자본주의를 파괴하기 위해서는 군대가 필요하다”는 신념하에 결성된 조직이 적군파다. 좌익세력 내에서도 소수였던 이들이 공안의 탄압을 피해 산으로 피신하고 벌어진 일은 상상을 초월하는 자기 파괴적 행위.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는지를 사회심리학적인 관점에서 바라본 책.

사볼타 사건의 진실 v.264

1920년대 ‘사볼타’라는 한 무기회사에서 벌어지는 파업 사태를 둘러싸고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사랑하고 증오하고 반목하는 관계를 그린 소설. 추리소설의 형식을 취한 소설은 누군가의 법정증언, 1인칭 시점의 독백 등을 시간상으로도 앞뒤로 뒤섞어 서술하면서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다. 계급상승을 꿈꿨던 한 가난한 젊은이의 삶이 구차해보이기도 하고 불쌍해 보이기도 한다. 나라면 어떻게 행동했을지 생각하게 만들던 상황.

이상호 기자 X파일 : 진실은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

삼성 재벌이 정치권을 휘어잡기 위해 꾸몄던 음모가 담긴 육성녹음 파일이 있었고, 이를 보도하기 위한 한 기자의 외로운 싸움이 있었다. 자본이 정치를 지배하는 사회에서의 외곬수가 그 자본에 대항하여 어떻게 싸워왔는지에 대한 기록. 결과는 절반의 승리? 또는 또 다시 평안한 일상? 이 사건은 이건희, 이상호, 노무현, 노회찬 등의 인물들을 엮으며 현재진행형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 와중에 안철수 국회의원 탄생.

백은비사 : 은이 지배한 동서양 화폐전쟁의 역사

서양의 시각, 금(金)의 시각으로 서술됐던 경제사를 동양의 시각, – 사실은 다분히 중국의 시각이지만 – 은(銀)의 시각에서 다시 바라본 책. 유럽의 금융발전, 주식회사의 탄생, 중국의 제조업, 유럽의 남미 수탈, 금본위제, 아편전쟁 등 굵직굵직한 사건들 속에서 은(銀)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촘촘히 알려준다.

공공서비스, 불평등 심화, 그리고 “연대적 의무”

미국인의 삶에서 불평등 심화를 걱정하는 더 중요한 세 번째 이유는, 빈부 격차가 지나치면 민주 시민에게 요구되는 연대 의식을 약화시킨다는 사실이다. [중략] 상류층 지역에서는 경찰에 의존하기보다는 사설 경비업체와 계약한다. 자동차도 한집에 두세대가 되다보니 대중교통을 이용할 필요가 없어진다. 이처럼 부유층이 공공장소나 공공서비스를 이용하지 않게 되면서, 그것들은 달리 대신할 수단이 없는 서민들만의 몫이 되어버린다.[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이창신 옮김, 김영사, 2010년, p368]

마이클 센델의 베스트셀러 – 한국에서 인문학 서적의 돌풍을 일으킨 –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사회의 불평등 심화가 가지는 핵심적인 문제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유사 이래의 위대한 철학자들이 더 좋은 사회을 위한 시민의 도덕적 책임의 세 범주들, 즉 “자연적 의무”와 “자발적 의무”에 덧붙여 센댈과 같은 “공동체주의자”들이 주장한 “연대적 의무”가 부의 불평등으로 말미암아 희미해지는 상황을 묘사한 구절이다.

공공서비스는 실제로 자본주의 물질문명의 비약적인 발전에 결정적 기여를 한 재화이자 서비스다. 고속도로, 철도, 항만, 학교, 경찰, 군인 등의 인프라스트럭처 및 각종 서비스들은 사회가 발전하면서 필연적으로 늘어날 수밖에 없는 집합소비재에 대한 소요/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국가가 제공한 재화 및 서비스다. 이러한 재화/서비스는 지난 시절 시장에서 공급되기 어려운 제약조건 때문에 주로 국가가 공급해왔다.

덕분에 우리는 우리의 전 세대가 지불한 도로를 이용해 자동차 여행을 즐기고, 치안의 보호를 받고, 공립학교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는 우리가 도덕적 행위자로서 도달하는 방법론으로 “서사”라는 개념을 제시했다고 센델이 말하고 있는데, 이런 공공서비스에서도 일종의 서사의 개념이 적용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 세대는 전 세대의 땀으로 만들어진 공공서비스를 이용하였고, 이에 따라 유사한 공공서비스를 다음 세대에 물려줄 “연대적 의무”가 발생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이런 “연대적 의무”는 희미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가장 우선적으로는 공공재정의 위기다. 이로 말미암아 많은 공공서비스는 민영화/사유화되었는데 여기에서 강조되는 것은 오염자부담원칙(polluter pay principle)이다. 개인적으로는 무임승차를 방지하기 위한 효율적인 방편으로 지지하는 바이지만, 역시 다음 세대에게 빚을 떠넘긴다는 점에서 고유의 “연대적 의무”에서는 멀어지고 있다.

공공서비스에 대한 “연대적 의무”는 美민주당의 진보적 투사로 떠오르고 있는 엘리자베스 워렌이 한 가정집에서 했던 연설에서 잘 설명되고 있다. 그는 그 연설에서 자본가들이 “우리가 낸 세금으로 만든 도로로 운송”해서 돈을 벌었으니 “다음 세대를 위해 내놓는 것이 사회의 암묵적 계약이 아니었냐”고 묻고 있다. 탈세와 이로 인한 공공재정의 위기를 질타한 이 연설에서 그는 서사적인 “연대적 의무”를 잘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의무감의 퇴색은 센델이 지적하는 것처럼 동시대의 소비영역에서도 진행되고 있다. 경찰기능이 완전 민영화된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 많은 이들이 사설경찰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다. 자동차가 늘어나면서 대중교통 확충보다는 기름 값 추이에 더 신경을 쓰는 형편이다. 실제로 런던에서는 한때 부자동네 의회가 시의 지하철 확충에 자신들의 돈을 내지 못하겠다고 우긴 적도 있었다. 부의 편중에 따른 의무감 퇴색의 전형적 예다.

이러한 관점을 아까 올린 목동의 사례로 보면 흥미로워진다. 학교라는 공공서비스가 – 사립학교라 할지라도 여전히 공공적 기능이 있다 – 목동에 위치하면서 주민들은 교육 혜택을 누려왔다. 여러 요인에 의해 “귀족 학군”으로 분류되며 집값 상승이라는 부수적 효과도 거둔다. 이 과정에서 주민들은 교육을 “목동 학군”의 일종의 사적재(私的才)로 향유하려는 욕망이 생겼다. 저소득층과 그 사적재를 나누기가 싫다고 한다.

요컨대 물질문명의 발달에 따른 재화/서비스 공급방식을 보면 대개의 자기서비스(self-help)가 주를 이루었고, 사회가 발달하면서 정부에 의한 공공서비스의 공급이 활성화되다가 이제 여러 서비스들이 분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다시 사적재와 공공재가 분화되는 길을 걷고 있다. 이 과정에서 공동체의 서사적인 연대의식은 희미해져가고 있다. 또는 심지어 특정 공공재를 사적재나 되는 것처럼 착각하기까지 한다.

행복주택 때문에 “패닉”상태라는 동네 이야기

“목동 사는 이유가 학군 하나 때문인데, 이제 집값 떨어질 일만 남았죠.” 행복주택 시범지구로 목동 유수지(홍수량의 일부를 저수하는 곳)가 정해지면서 목동주민들이 손사래를 치고 있다. 목동지구가 다른 지역보다 행복주택에 대한 반발이 심한 이유는 학군 때문이다. 행복주택이 목동에 들어설 경우 이들 원주민과 상대적으로 소득이 적은 행복주택 입주민들의 자녀가 함께 학교에 배치돼 학군이 나빠질 것이란 우려가 나오고 있는 것. 결국 학군 때문에 목동을 선택하려는 수요자들이 줄어들어 목동 특유의 학군 프리미엄도 그만큼 희석될 수 있다는 얘기다.[행복주택 이웃될 13억원 하이페리온 주민들 패닉]

“행복주택”은 박근혜 정부가 서민의 주거안정을 위해 새로이 시작하는 임대주택 사업이다. 정부의 목표는 “대중교통이 편리한 철도부지와 도심 유휴부지를 활용해 5년간 총 20만 가구를 공급”하는 것으로, 이번에 인용한 기사의 사업부지를 비롯하여 행복주택 시범지구를 7곳 선정하였다. 목동 유수지는 대중교통이 편리하고 도심 유휴부지를 활용했다는 점에서 정부의 목표에 잘 부합하는 사업부지로 여겨진다.

문제는 해당 입지가 자연스럽게도 기사의 인터뷰 내용처럼 기존 주거지역과의 소위 사회적 갈등을 야기할 가능성이 높은 입지라는 점이다. 기사제목의 천박함은 별도로 하더라도 저 정도의 정서가 기존 주민들의 마음속에 어느 정도는 자리 잡고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처음부터 임대주택의 “소셜믹스”가 의무화된 단지도 아니고 나름 고급 아파트의 거주민으로서 기득권이 있다고 여겨 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전에 소셜믹스 단지에서 임대주택 거주민을 격리시키려는 시도에 대해 개탄한 바 있고 이 기사를 트윗하면서도 좀 거칠게 비난했지만, 경제적인 관점에서 좀 더 냉정히 들여다 볼 필요는 있을 것 같다. 목동은 기사에서도 언급하고 있듯이 집값에 “학군 프리미엄”이 상당한 동네다. 소셜믹스 단지처럼 임대주택의 입지가 애초에 주어진 조건도 아니었다. 이 둘이 결합하면 원주민으로서는 억울하기도 할 노릇이다.

이를 경제학 용어로 표현하자면 임대주택이 들어서면서 일종의 “부(負)의 외부효과”가 예상되는 상황인 것이다. “하이페리온의 경우 전용면적 158㎡의 시세는 13억원 수준”인 고급 아파트 지역에 저렴한 임대주택이 들어서고 이들 거주민의 자녀가 같은 학교에 다니게 되면 “귀족 학군”의 이미지가 흐려져 집값의 하락이 예상되고, 교통상황도 악화되는 등 외부불경제가 발생할 개연성이 있는 상황인 것이다.

이런 유의 외부불경제가 집값에 악영향을 끼친 것에 대해 손해배상의 정당성을 인정한 대표적인 사례가 조망권 침해 사례일 것이다. 일조권 등 정서상 기본적인 권리라 여겨지는 권리에서 한발 더 나아가 조망권이라는 약간은 “여유로운 소리”로 여겨질 수도 있는 권리가 법적으로 인정받은 셈인데, 그런 판결이 나온 것은 법원이 조망권 덕분에 소송인들의 집값에 프리미엄이 붙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바로 앞에 세워진 아파트 때문에 한강이 바라보이는 조망권이 침해됐다면 아파트 건설사가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이 나왔습니다. [중략] 재판부는 한강 주변 아파트의 경우 조망이 가능한지 여부나 정도에 따라 수억원까지 프리미엄이 붙는 등 조망권이 아파트의 사회적/경제적 가치를 크게 좌우한다고 봤습니다. [중략] 이번 판결을 내린 재판부는 조망의 이익은 항상 법적으로 보호받을 가치가 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한강처럼 특정한 장소가 조망에 있어 특별한 가치를 갖고, 사회관념상 독자적 이익을 볼 수 있다면 법적으로도 보호돼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한강 조망권 침해 첫 배상판결]

그렇다면 “조망권 프리미엄”처럼 “학군 프리미엄”도 법원에서 유사한 판결을 받을 수 있을까? 나는 정서적 이유와 실용적 이유에서 어려울 것이라 생각한다. 학군 피해자는 조망권 피해자와 달리 저소득층과 섞이기 싫다는 이기주의자란 비난을 받을 가능성이 많다는 점이 정서적 이유다. 학군 프리미엄의 경제적 영향은 조망권 프리미엄에 비해 원인결과가 모호하고 장기적이어서 가치의 측정이 어렵다는 점이 실용적 이유다.

아파트란 주거양식이 한국에 뿌리내린 이래 비슷한 경제적 지위를 가진 이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고, 그럼으로써 사회적 네트워크가 형성된다는 사회계층 분리효과는 암묵적으로 인정되는 바다. 그럼에도 이런 상황이 집의 경제적 가치를 더 높였다는 주장은 정서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또한 설사 그렇다 할지라도 그러한 정(正)의 외부효과를 조망권처럼 “특정한 장소의 특별한 가치”로 측정하는 것은 매우 어려울 것이다.

그들이 정말 행복주택 때문에 경제적, 사회적 피해를 입을 것이라 여겨진다면 장기전세주택을 주민반대로 좌절시킨 양재동 주민들처럼 반대운동에 나서든지, 국토부로부터 반대급부를 받든지 하는 것이 현실적 대안일 것이다. 하지만 어떤 대안일지라도 “그들”과 섞이기 싫다는 정서를 무마시키기는 어려울 것이다. 아파트란 주거형태가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것이니 말이다. 게다가 무려 “13억 원짜리 하이페리온”이다.

투자대상으로서의 남한교회에 대한 단상

그 후 1990년대 말이 지나면서 교회가 정체되고 성도 수의 성장이 둔화를 넘어 하향세로 돌아서자 교회성장론은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됩니다. 그것은 마케팅과 자본주의 논리의 도입입니다. 이것을 가장 극적으로 도입하고 성공한 사례가 빌 하이벨스(Bill Hybels) 목사의 윌로우 크릭 교회(Willow Creek Community Church)입니다. 자신의 교회가 속한 곳의 지역주민들을 분석하고 그들의 취향을 파악하여 거기에 알맞은 홍보 전략을 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한국 같은 경우는 자신들의 교회에 한 명의 성도라도 더 끌어 모으기 위해 소위 말하는 총동원 주일 등의 행사를 통해 경품과 많은 실적(?)을 올린 성도들에게 시상을 하는 해괴한 짓들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다른 교회에 멀쩡히 다니고 있는 사람들도 자기 교회로 데리고 오는 짓들을 하기 시작합니다.[진정 회개할 곳은 교회다, 권영진 지음, 리북, 2011년, pp171~172]

스스로가 목사이신 권영진 씨의 한국교회에 대한 쓴 소리를 담은 책의 일부다. 대형화, 자본주의화, 세속화, 정치화의 길을 걷고 있는 한국교회의 현황을 내부자의 입장에서 차근차근 비판하고 있다. 여러 주제들이 마음에 와 닿지만 어디까지나 국외자인 내 입장에서는 – 특히 최근의 나 – 이 인용문에 공감이 간다. 바로 연휴 3일 동안 “총동원 주일”에 동원된 듯한 전도사들로부터 시달려야 했기 때문이다.

지난 3일 간 수명의 전도사들이 우리 집 벨을 눌렀다. 처음 얼마간은 “누구세요?”라고 응답하며 일없으니 가보라고 조용히 이야기했지만 요즘은 그마저도 귀찮아 아내와 나는 인터폰의 비디오를 슬며시 본다. 택배 노동자 차림이 아닌 낯모르는 이들이 있으면 십중팔구 이들 전도사다. 연휴기간 역시 아내와 나는 조용히 비디오를 지켜봤다. 그들은 역시 예상대로 연휴 기간 동안 전도에 동원된 신도들이었다.

하필 석가탄신일에 그토록 유난스럽게 더 자주 전도를 다니는가에 대해선 의문을 제기하지 않겠다. 다만 중학생이 되었을까 할 정도의 어린 아이들까지 동원된 그 행동이, 조금만이라도 응답을 한다면 다른 사람들의 사적인 영역을 언제라도 침범하겠다는 스팸 메일과 무엇이 다른지 궁금할 따름이다. 또는 요즘 와서 그 폐해가 드러나 세력을 확장시키지 못하고 있는 다단계 판매와 뭐가 다른지 궁금할 따름이다.

이러한 전도활동은 자본주의化된 교회 주식회사의 활동일 따름이다. 그들이 나라는 특정 개인의 종교적 구원에 관심을 가지고 방문한 것이라면 문 앞에서 좀 더 기다리거나 다른 날 다시 와서라도 전도를 시도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 정확히는 그들을 보낸 교회는 – 나의 구원이 아닌 신도수의 양적증가에 관심이 있을 따름이기 때문에 내가 응답이 없자 미련 없이 다음 목적지를 향해 발길을 옮긴 것이다.

트위터에서 이런 경험에 대해 불만을 털어놓자 어떤 이는 자기 남편이, 집사 친구 때문에 “총동원 전도주일” 기간 동안만 그 교회에 가고 올해엔 경품으로 중국제 스테인리스 주방기구를 받아왔다고 한다. 앞서 말한 다단계 판매도 생각나고 어릴 적 친구를 학원에 데려오면 참고서를 공짜로 준다던 주산학원의 마케팅 전략도 생각난다. 중국제 스테인리스 주방기구에 그 분의 영혼을 얼마나 더 많이 구원받았을지 궁금하다.

물론 교회도 성장이 정체되어 있어서는 곤란할 것이다. 신도들이 편안하게 머물러야 할 적절한 공간도 마련하고 구휼활동도 할 돈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현재 남한의 개신교계의 성장욕구는 그 도를 넘어서고 있는 것 같다. 권영진 목사가 지적하고 있듯이 이 성장욕구는 자본주의 기업의 그것과 내용상으로 거의 일치하고 있다. 거기에 법인세를 납부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기업보다 더한 특혜를 받고 성장하고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남한교회야말로 사모펀드와 같은 투자자들이 노릴만한 투자대상으로 가장 적당한 자산이다. 소비자들은 콘텐츠에 대한 확신이 있고 스스로 새로운 소비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휴일노동도 불사한다. 경영자들은 정치권과 긴밀하게 연결돼있어 정치적으로 시달릴 가능성도 적다. 세금도 내지 않는다. 현재 투자의 장애요인은 자신이 자본주의 기업이란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정서적 거부감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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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동원 전도주일”로 구글링하여 발견한 이미지

신평사의 신용은 누가 어떻게 유지시킬 것인가?

해외 신용평가사로부터 신용등급을 받는 건설사가 자취를 감출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최근 GS건설이 해외 신평사의 신용등급을 받지 않기로 하면서 해외 신평사의 신용등급을 가진 국내 건설사는 포스코건설 단 1곳에 불과하다. 게다가 포스코건설의 신용등급도 국내보다 크게 낮은 탓에 해외 채권 발행이 여의치 않아지면서 해외 신평사의 신용등급 무용론이 불거지고 있다.[해외 신평사 신용등급 무용론 대두]

국내 3대 신용평가사들이 국내 기업에 대한 신용등급 고평가 현상이 여전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외국 신평사보다 평균 여섯 등급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는 평가기업이 내는 수수료가 주요 수익원인 신평사 입장에서는 경쟁사보다 낮은 신용등급을 부여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렵기 때문으로 분석되고 있다.[국내 3대 신평사, 신용등급 ‘뻥튀기’ 심각]

같은 신문에서 같은 날짜에 보도된 두 기사다. 한쪽은 해외 신평사의 지나치게 박한 신용등급을, 한쪽은 국내 신평사의 지나치게 후한 신용등급을 비판하고 있다. 쓴 웃음이 지어지는 상황이 아닐 수 없다. 기업이 초국적화되고 기업의 신용도를 바라보는 기준이 균일화되어 가고 있는 상황에서 국내 신평사와 해외 신평사의 눈높이는 사뭇 다르니 말이다.

그 이유는 다양할 것이다. 두 번째 기사에서 원인으로 들고 있는 평가받는 기업이 내는 수수료가 수익원이어서 신평사의 점수가 후할 것이라는 분석은, 물론 중요한 모순이긴 하지만 절반만 사실이다. 그게 주요원인이라면 역시 평가받는 기업으로부터 수수료를 받는 해외 신평사의 국내 기업에 대한 신용등급이 박한 이유는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해외 신평사가 국내기업에 대해 박한 이유로 공통적으로 들고 있는 이유는 컨트리 리스크다. 남북분단이라는 매크로 환경이 기본적으로 점수를 깎고 들어간다. 하지만 이 변수는 점차 덜 중요한 몫을 차지하는 것 같다. 해외에서 바라보는 더 중요한 매크로 환경은 이른바 한국 특유의 “재벌” 체제에서의 소유-경영의 불투명성에 따른 리스크인 것 같다.

흥미롭게도 국내 신평사는 오히려 이런 특수성이 높은 신용등급의 근거가 된다. 즉, 순환출자로 엮인 “재벌”社에 속해있는 계열사는 회사 자체의 능력보다 더 좋은 신용등급을 받는다. 신용 리스크 등이 불거질 경우 모기업에서 자금을 제공해줄 것이라는, 전혀 근거 없지는 않은 믿음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부실한 공사(公社)의 프리미엄도 상당하다.

국내 신평사가 외국 신평사보다 지나치게 높은 수준의 신용등급을 부여하는 것도 문제지만, ‘뒷북’ 신용등급 조정이 더 큰 문제라는 지적도 있다. [중략] 투자적격으로 분류됐던 LIG건설도 법정관리에 들어간 뒤에야 신용등급이 강등됐다.[국내 3대 신평사, 신용등급 ‘뻥튀기’ 심각]

이런 뒷북 신용등급은 주되게 국내 신용등급이 피평가기업이 갑인 상황에서 양산되는 “주례사식” 신용평가가 원인이겠지만, 그에 못지않게 관계기업이 뒤를 받쳐줄 것이라는 믿음이 그 평가의 근거가 된다. LIG건설이 바로 그 대표적 사례인데, 이 회사는 그룹이 지켜줄 것이란 시장의 믿음을 근거로 법정관리 바로 직전까지 회사채를 발행하기도 했다.

결국 이런 상황이니 그룹 계열사나 개발공사 등의 신용평가 레포트를 읽어보면 한심할 때가 많다. “현금흐름도 원활하지 않고, 부실사업도 많고, 우발채무도 만만치 않은데, 결론적으로는 모기업 혹은 국가의 – 암묵적이거나 명시적인 – 보증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A등급을 부여한다”는 식이다. 반(反)시장적 요소가 가장 시장적인 평가의 근거가 되는 장면이다.

알다시피 신용평가는 대공황 등 경제적 격변기를 거치며 그 평가의 객관성이 시장참여자의 의사결정에 도움을 준다는 사실이 역사적으로 검증되며 발달해 왔다. 이제 “신용”이라는 말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그 어느 단어보다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데, 지난 2008년의 위기를 “신용위기(credit crunch)”라 부른 사실에서도 그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다.

실물의 윤활유인 돈을 은행에서 제공한다면, 그 돈의 흐름에 대한 믿음은 신평사가 제공한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크다. 하지만 그 중요성에 비해 신용평가의 신뢰도는 점점 더 떨어지고 있다. 만일 은행이 제공하는 화폐가치가 신평사가 제공하는 신용처럼 들쑥날쑥하면 어떻게 될까? 아노미 상태가 될 것이다. 신평사의 신용은 누가 어떻게 유지시킬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