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읽은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소설들


올해의 책읽기 중에 가장 모험적인 시도였다면 연초에 시도한 ‘롤리타 원서로 읽기’였다. 소설의 원작자인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러시아 국적이었지만 귀족 명문가에서 태어난 천재인지라 여러 나라 언어에 능숙하였으며, 이 소설을 쓸 때 그는 모국어인 러시아어대신에 영어를 사용하였다. 하지만 네이티브가 쓴 영어소설이 아니라고 결코 만만히 볼 것이 아니었다. (물론 영어실력 부족이 가장 큰 원인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소설을 읽으며 나보코프가 사용한 수많은 은유와 현학적인 단어 등으로 인해 – 어릴적 한국어로 이미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 한 문단 한 문단을 힘겹게 타고 올라야만 했다. 그런 시도 끝에 완독에 성공했음에도 – 또는 그러하였기에 – 만족감은 기대 이상이었다.

예를 들어 주인공인 험버트 험버트가 롤리타와 묵었던 여관에서 정체모를 남자와 나눴던 대화에서 험버트의 머릿속에 잠재하고 있던 죄책감이 대화 속에서의 언어적 유희로 표현되던 상황은 영어가 아니고서는 쉽게 이해될 수 없는 상황이었고, 소설의 곳곳에 배치되어 있는 이런 가느다란 감정의 뉘앙스는 영어로 읽어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소아성애라는 비뚤어진 여성 혐오적 욕망을 관능적이고 현학적으로 풀어낸 탓에 – 또는 덕분에 – 아직도 이 소설의 제목과 캐릭터는 유사한 사회적 현상을 묘사하는데 가장 손쉽게 쓰이는 상징이 되었고, 소설 그 자체의 매력을 감상하기 위해서나 또는 그 욕망의 사회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번쯤 읽어야할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롤리타가 힘겨운 고산등반이었다면 요코미조 세이시의 옥문도(獄門島) 읽기는 가벼운 트래킹이라 할 수 있었다. 영국에 셜록 홈즈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사설탐정의 전범이라면 일본은 바로 요코미조 세이시가 창조해낸 긴다이치 코스케(金田一耕助)라 할 수 있다.1 1947년 처음 연재되기 시작했다는 이 소설은 역시 긴다이치가 등장하는 요코미조의 다른 소설에 비교할 때에 – 적어도 내가 읽은 중에서는 – 가장 미스터리로서의 매력이 강하고 이 매력이 하이쿠 등 일본 고유의 문화와 잘 융합되어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긴다이치 코스케의 다소 엉뚱한 캐릭터 설정과 뛰어난 건축물을 보는 듯한 주변 캐릭터 설정의 기하학적 배치가 훌륭하게 결합되어 있다는 점도 이 작품의 매력이다.

소설은 긴다이치가 동료군인이었던 한 명문가의 장남이 죽음을 맞이하며 했던 부탁을 들어주러 “지옥의 문”이라는 끔찍한 이름의 섬에 찾아가면서 겪는 사건을 그리고 있다. 이 소설의 매력은 섬으로 향하는 배에서부터 시작한다. 요코미조는 이때부터 등장하는 어느 조연 하나도 낭비하지 않고 저마다의 역할을 정확히 배치하여 활용한다. 하다못해 섬으로 싣고 가는 절의 종(鐘)에도 역할이 배당되어 있다. 그리고 이후 발생하는 살인사건은 각각의 하이쿠의 대응하는 모양새를 띤다.2 소설의 또 하나의 매력은 그 살인의 배경에 거대하게 자리 잡고 있는 섬의 폐쇄성, 그리고 더 매크로하게 일본이라는 섬이 지니고 있는 폐쇄성과 봉건성을 비판하고 있다는 점이다. 재미와 메시지를 함께 지닌 작품.


지난 11월 말 교토(京都)를 여행했다. 그래서 가기 전에 참고용으로 고른 소설이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였다.3 1956년 출판된 이 소설은 하야시 쇼켄이라는 절의 도제가 1950년 실제로 금박으로 덮여 있던 누각을 불태워버렸던 충격적인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다.4 작가는 소설을 쓰기위해 5년간 자료조사를 할 만큼 치밀하게 작품 준비를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현실의 하야시 쇼켄은 소설 속에서 말더듬과 부모에 대한 원망으로 열등감에 젖어있는 미조구치로 재탄생한다. 미조구치는 어쩌면 하야시 쇼켄과 당시 여러 내적 갈등을 겪고 있던 미시마 유키오 자신이 뒤섞여 있는 캐릭터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읽다보면 ‘미시마 스스로가 먼저 금각사를 태워버리지 못해서 이 소설을 쓴 게 아닐까’하는 의문이 들 정도다.

미시마 유키오가 “이상한 에로티즘을 구사”한다는 평이 있는데 이 소설 역시 그런 이상한 에로티즘이 잘 묘사됐다는 점에서 시사소설인 동시에 작가의 뇌내망상과 상상력의 재창조물이라 할 수 있다. 미조구치는 임신부의 배를 걷어차며 쾌감을 느끼고 여러 에로틱한 상황에서 금각사의 환영을 중첩되며 성적환상에 시달린다. 이런 면에서 방화는 명백히 미조구치의 오르가즘과 연결되어 있고, 먼 훗날 미시마 유키오 스스로가 자행하는 자살극에서 느꼈을 오르가즘과 연결되어 있다. 금각사라는 미(美)는 파괴해야만 영속한다는 모순된 강박은 “인간이 잔인해지는 순간은 단말마의 신음을 볼 때가 아니라 나뭇가지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이 비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때”라는 작중인물의 대화에서도 엿볼 수 있다.

좌익 진영의 사회기반시설 건설을 위한 연기금 활용론에 대하여

향후 사회기반시설 건설에 국민연금기금을 적극 활용할 수 있다. 특히 임대형 사업은 정부가 기본 수익을 보장하므로 국민연금기금의 공공성·안정성·적정수익성을 동시에 제공한다. 국민연금기금이 참여할 경우 사회기반시설의 전성·건설·운영하는 과정에 지역 사회·연금가입자·연금공단이 주체가 되는 민주적 공공부문 지배 구조 모델도 만들어질 수 있다. 필요하다면 ‘사회기반시설에 대한 연기금투자법’(가칭)을 제정하여 국민연금기금의 사회기반시설 투자를 위한 법적 인프라를 갖추어야 한다.[대한민국 금고를 열다, 오건호 지음, 레디앙, 2011년, p185]

거의 모든 좌익은 민간투자사업을 반대한다. 국제적으로는 PPP(Private Public Partnership)이라 불리는 이 사업방식은 도로, 철도, 환경시설 등 통상 공공재(公共財) 혹은 인프라스트럭처로 명명되며 정부부문이 공급하던 재화 및 서비스를 민간자본의 힘을 빌려 제공하는 방식을 말한다. 광의의 “민영화”라 하면 소비에트 사회주의 블록에서 취했던 재화 및 서비스 일반의 국유화가 아닌 모든 민영화 방식을 아우르는 것이지만 민간투자사업은 그 중에서도 상기 사업방식에 특정된 민영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이런 PPP사업의 본격화가 이른바 레이거노믹스와 쌔처의 “신자유주의 시대”와 일치한다는 정황 탓에 앞서 말했듯이 PPP는 좌파에게 “공공재의 사유화” 수단이자 “공공의 적”으로 간주되어 왔다. 진보적 성격이 강한 문재인 정부 들어서 민간투자사업으로 추진되어오던 사업이 재정사업으로 전환된달지, 유료도로법 개정을 통해 강한 공적통제를 시도한달지, 사업 재구조화를 통해 통행료 인하를 추진하는 등의 시도가 이어지고 있는 것도 그런 맥락이라 할 수 있다. 20년간의 민간투자사업의 전환기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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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acuated Highway 401 Color” by Kenny Louie. Licensed under CC BY 2.0 via Wikimedia Commons.

인프라스트럭처 자금조달 수단에 대해 알아보자. 크게 두 개로 나누자면 재정사업과 민자사업이다. 두 수단을 섞는 방식도 있고, 일부 사업은 원인자부담금을 활용하기도 한다. 이 두 수단을 달리 말하면 비(非)시장적 수단과 시장적 수단이라 할 수 있다. 민자사업과 시장적 수단은 뉘앙스가 다른데, 연기금이 민자사업에 투자할 경우 민간자본이라기보다는 사회자본에 가까워 민영화보다는 “시장화”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 전 세계적으로 각종 연기금은 이미 민자사업에 많은 돈을 투자하고 있다.

“대체투자(Alternative Investment)” 시장은 전통적인 투자시장인 주식, 채권 등과 달리 Private Equity, 부동산, 인프라스트럭처 사업, 원자재 등에 투자하는 시장을 말한다. 이 시장은 전통적인 투자시장의 계속되는 낮은 수익에 대한 피난처가 되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에 따르면 100개의 가장 큰 규모의 대체 펀드 그룹의 자산은 지난 해 6% 성장한 3조3천억 달러에 달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중 가장 핫한 투자자들이 바로 연기금들이란 점이다.[대체투자, 인프라스트럭처, 공익성 등에 관한 단상]

이런 상황에서 보면 오건호 씨 등의 국민연금 활용론은 순진한 측면이 있다. 그들은 민자사업 일반을 “절대악”으로 치부하면서 국유화/사회화를 주장하는데, 그 자금수단으로 이미 시장화를 통해 투자를 하고 있는 국민연금의 활용론을 손쉽게 꺼내기 때문이다.1 이 활용론의 최신버전이 권미혁 의원의 주장이다. 하지만 실상을 보면 국민연금은 민자사업이 목표수익률에 미치지 못하여 최근 민자사업에서 갈등을 빚고 있다. 이미 시장에 진입한 투자자에게 공익(公益)을 위해 더 낮은 수익률로 각종 사업을 떠안으라는 복안이 타당한지 자문해야 한다.

우리 정치세력은 좌우를 가리지 않고 연금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 아무렇게나 꺼내 쓸 수 있는 쌈짓돈으로 여기는 것 같다.2 하지만 시장경제적 관점에서 보자면 사회적 투자의 가장 큰 돈줄인 국민연금은 정치인이 쓸 수 있는 돈이 아니다. 오히려 시장 사회주의적 관점에서 보자면 그러한 정무적 관점이 시장을 교란하고 더 나아가 사회적 투자의 합리성을 저해할 수 있다. 연금의 수익률이 공익(公益)인가? 낮은 도로 통행료가 공익인가?

이명박이 판 쥐구멍

집권 초기 이명박 정부는 국가재정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예비타당성 조사를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감세로 인한 재정 부족분을 예산 절감을 통해 보전하겠다는 작은 정부론의 정책 기조에 따른 것이었다. [중략]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집권 1년이 지나면서 입장이 정반대로 바뀌었다. [중략] 이명박 정부는 2009년 3월 국가재정법 시행령 개정을 통해 예비타당성 조사 면제 요건을 대폭 완화했다. [중략] 정부는 예비타당성 조사 면제 항목 중 긴박한 사업 추진이 요구되는 ‘재해복구 지원’을 ‘6. 재해예방·복구지원’으로 수정했다. 재해예방이 왜 예비타당성 조사를 받지 말아야 하는지 이해하기 힘들다. [중략] 결국 4대강 사업 예산 22.2조 원 중 핵심 사업인 준설, 보 설치 등을 포함해 총 89%가 예비타당성 조사에서 제외되었다. [대한민국 금고를 열다, 오건호 지음, 레디앙, 2011년, pp169~171]

1999년 도입된 예비타당성 조사는 한국의 국가 재정 체계에 있어 중요한 진전으로 평가받는 제도다. 국가재정법 및 관련시행령은 예비타당성 조사의 대상사업, 사업규모, 제외사업 등 구체적 사항을 담겨 있어 제도적 근거가 마련되었다. 오건호 씨에 따르면 이 제도가 도입되기 전에는 사업 추진 부서가 자체적으로 타당성 조사를 벌였다. 1994~1998년 동안 진행된 자체 타당성 조사 32건 중 타당성이 없다고 판명된 것은 단 한 건에 불과했다고 한다. 반면 제도가 도입된 이후인 1999년부터 2008년까지 총 378건의 조사 대상 사업 중 타당성이 있다고 판명된 사업은 216건, 사업수의 57%에 불과했다. 제도의 위력이 검증되는 수치다.

여러 근본적 결함에도 이렇듯 재정건전성에 기여했던 제도를 무력화시킨 혐의가 이명박에게 있다. 애초 보수가 의례 그렇듯 작은 정부를 지향했던 이명박 정부는 법상 500억 원 이상에만 실시하는 예비 타당성 조사의 대상 범위를 400억~500억 원 규모의 사업에도 ‘간이 예비타당성 조사’를 실시하겠다고 의지를 밝힌 바 있다. 하지만 “대운하”라는 거대한 토건사업을 기획하고 있던 이명박 정부는 이런 제도강화가 오히려 자신의 발목을 잡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호기롭게 “민자사업”으로 추진하겠다고 했던 당초 계획이 무산되고부터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의 무리수는 인용문과 이 블로그에서 적은 몇몇 글에서 보는 바와 같다.

이런 사정은 국토부 내부 문건에서도 확인된다. 가 2008년 3월에 보도한 내부 문건에서 국토부는 “민간사업자의 수익성 확보에 어려움이 예상 된다”, “관광단지 개발 같은 부대사업을 적극 지원”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한반도대운하는 수질악화나 환경파괴 우려 외에도 애초부터 막대한 재정투입이나 주변 개발권 등 이권을 보장해주지 않고서는 경제성도 없어 추진이 불가능한 사업이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의 강력한 추진의지 속에 대운하는 인수위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으며 속전속결 추진과 임기 내 완공까지 선언한 것이다.[한반도 대운하, 어떻게 ‘4대강 사업’으로 둔갑했나]

이명박 정부는 “정상적” 보수 정부일지라도 어떻게 편법으로 사익을 취하는 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입버릇처럼 외쳐대는 “작은 정부”와 “재정 건전화”는 사익 앞에서는 금세 “큰 정부”와 “재정낭비”로 이어진다. 이명박 정부는 게다가 수자원공사라는 우량 공기업을 일종의 우회적인 자금동원수단으로 활용하면서 “너무 큰 정부”로서의 추태까지 보였다. 흥미로운 것은 그러다 정부재정이 악화되기라도 하면 우익 이론가들은 이를 정부무용(無用)론으로 써먹기도 한다. 사실 이점이 진보주의자들의 정부역할론의 약한 고리이기도 하다. 제도는 훌륭해도 정부부문에는 얼마든지 이명박이 도망갈 쥐구멍이 있는 법이라서 말이다.

“출퇴근 2시간을 전차에서 허비하게 되면 가정생활에도 문제가”

나의 사견으로는 출퇴근 2시간을 전차에서 허비하게 되면 가정생활에도 문제가 생기는 등 좋지 않으며, 30분이 좋을 듯하다. (중략) 현재 경성시가지계획의 목표 인구는 110만이며, 인천은 20만이다. 여기에 이번에 결정한 구역(경인시가지계획구역) 목표 인구 약 100만, 경성 북부와 동부 방면에 신설할 주택도시에 목표 인구를 약 70만으로 하여, 합계 300만을 수용할 계획이다.[1939년 10월 21일 市街地計劃委員會速記錄 / 서울의 기원 경성의 탄생, 염복규 지음, 이데아, 2016년, p360에서 재인용]

일본이 우리를 강점하던 시절, 총독부의 제5회 시가지계획위원회에서 총독부 기사 야마오카 케이스케가 했던 발언의 일부다. 1919년 처음으로 『도시계획법』을 제정하여 “도시계획”이란 개념을 자기네 도시공간에 적용한 일본이 이 개념을 한국 땅에도 적용하였고, 상기 인용한 발언은 이러한 공간계획을 도시에서 더 확장하여 일종의 지역계획 내지는 광역계획의 개념으로 접근한 “경인시가지계획”의 사례다.

지금 시점에서 보면 각각의 도시는 훨씬 많은 인구가 살고 있어 계획이 소박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지만, 당시로서는 매일신보라는 신문에 “경인 메트로포리쓰 환상곡”이라는 제목의 2면에 걸친 특집기사를 낼만큼 오히려 약간은 무모한 광역도시권 계획에 가까웠다. 흥미로운 점은 인구와 함께 통근시간의 기준치를 제시한 것인데 이를 통해 공간의 규모를 가늠할 수 있는 잣대가 된다는 점에서 유용한 기준치일 것이다.


『매일신보』 “경인 메트로포리쓰 환상곡”

야마오카는 “출퇴근 2시간을 전차에서 허비하게 되면 가정생활에도 문제가 생긴다”고 단언하였다. 현대인의 눈으로 보아도 이는 타당한 발언이다. 그때보다 노동시간은 어느 정도 줄었을 것이라 가정한다해도 출퇴근에 2시간을 허비하게 되면 소위 “저녁 있는 삶”을 누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 경인 메트로폴리스에서는 이것이 현실이다. 서울의 직장인의 출퇴근 시간은 134.7분으로 2시간이 넘는다.

우리나라 직장인의 하루 평균 출퇴근 시간이 약 100분(1시간 40분)이 넘는 것으로 조사됐다. 서울에 사는 직장인의 경우에는 2시간이 넘었다. 17일 취업포털 잡코리아에 따르면 남녀 직장인 820명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하루 출퇴근 소요시간이 평균 101.1분인 것으로 조사됐다. 출근 시간은 48.1분, 퇴근 시간은 53분으로 나타났다. 서울 거주 직장인의 경우 이 시간이 134.7분으로 가장 길었다. 이어 기타 지역 118.8분, 경기도 거주 직장인 113.4분 순이었다.[직장인 평균 출퇴근 시간 101분… 서울은 2시간 넘어, 2017년 7월 17일, 조선일보]

이런 시간낭비를 줄이는 방법으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 첫째, 교통 인프라스트럭처의 확충이다. 현재 GTX 등 여러 교통계획이 입안되어 있기는 하지만, 재정문제 등 여러 사유로 인하여 추진이 지지부진하다. 좀 더 장기적인 프로세스로는 위성도시가 아우르는 광역도시권이랄지 용도지역을 분할하여 교통을 유발시키는 조닝(zoning)과 같은 계획기법에 대한 반성으로 직주근접 내지는 복합개발을 늘려나가는 방식이 있다.

공간계획이 아닌 대안으로는 노동시간 단축이나 재택근무와 같은 노동을 재배치하는 방법이 있을 수 있다. 이런 대안은 노자 간의 협약이나 노동시간 단축 법안 제정 등의 방법이 있으나 장기적인 효과로 귀결될 것이기에 결국 정부 차원에서는 공간계획의 방법으로 푸는 것이 현실적일 것이다. 문제는 새 정부는 인프라 예산을 대폭 축소했다는 점이다. 인프라가 “건설족”의 먹거리이기도 하지만, 복지이기도 하다는 사실에서 우려되는 대목이다.

“대량수학살상무기”의 위험성에 대하여

이른바 “4차 산업혁명”의 여러 혁명적 용어 중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이른바 “빅데이터 Big Data”다. 그런데 이 빅데이터를 “대량살상수학무기”1라 부르는 이가 있다. 뛰어난 학벌과 학문적 업적 덕택에 수학과 종신교수로 근무하던 캐시 오닐은 “수학을 현실세계에 적용한다는 아이디어에 매료”되어 교수직을 버리고 헤지펀드 디이 쇼(D.E. Shaw)의 퀀트가 된다. 이후 “수학과 금융의 결탁이 불러온 파괴적 힘에 환멸을 느끼고 월스트리트를 떠난” 그는 데이터 과학자로 활동하면서 또 다시 빅데이터가 가지고 있는 파괴적 힘에 주목하면서 2016년 인용한 책을 썼다.

‘유에스 뉴스’의 대학 순위 사업이 다양한 영역으로 확장되면서 이를 조작하려는 시도도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가령 2014년 ‘유에스 뉴스’가 발표한 세계 대학 순위에선 사우디아라비아의 킹 압둘아지즈 대학교의 King Abdulaziz University, KAU 의 선전이 돋보였다. 불과 2년 전에 신설된 KAU 수학과가 케임브리지와 MIT를 포함해 몇몇 전통적인 수학 강호들을 제치고 하버드의 뒤를 이어 세계 7위에 선정된 것이다. [중략] 조사에 따르면 KAU는 유명한 논문을 발표한 다수의 수학자들과 접촉했고 그들에게 겸임교수직과 7만2000달러라는 높은 연봉을 제공했다. [중략] KAU는 교수들에게 톰슨 로이터스 인용 색인 웹사이트에 등록된 근무처 정보를 KAU로 변경하도록 요구했는데, 그 웹사이트는 ‘유에스 뉴스’가 순위를 산정할 때 참조하는 핵심 출처였다. 이는 KAU가 겸임교수들이 발표한 출판물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다는 뜻이다. 교수들의 출판물이 인용된 빈도는 ‘유에스 뉴스’ 알고리즘의 주요한 요소 중 하나였기 때문에, KAU의 순위는 급등할 수밖에 없었다.[대량살상수학무기, 캐시 오닐 지음, 김정혜 옮김, 흐름출판, 2017년, pp113~114]

우리가 빅데이터 산업의 현 주소를 확인할 수 있는 경험으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 예를 들어 당신이 ‘다음 달에 교토나 가볼까?’하고 익스피디아 홈페이지에 접속해서 호텔을 두어군데 검색하고 나왔다 치자. 그러면 그 다음부터는 당신이 페이스북이나 다른 웹사이트에 접속할 때마다 익스피디어에서 추천하는 근사한 호텔 광고가 연달아 등장한다. 당신의 행동 패턴을 분석하여 집요하게 당신에게 “삐끼질”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비즈니스 역시 필자가 월스트리트를 떠난 후 잠시 머물렀던 스타트업 인턴트 미디어 Intent Media 에서 수행한 빅데이터 작업이었다.

저자는 언뜻 보면 대단히 거대하고 정교해서 인간이 인지할 수 없는 영역까지 현명하게 판단할 수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2 빅데이터 분석이 실은 어처구니없이 어리석은 판단의 당사자가 될 수도 있음을 여러 사례를 들어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 연출되는 근본적인 이유로 저자는 MBS의 사례를 들며 “수학은 쓰레기 같은 대출채권의 가치를 몇 배로 부풀릴 수는 있으나 해석은 순전히 인간의 몫”(p81)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빅데이터 비즈니스는 기계의 물신성(物神性)을 조장하며 이러한 결함을 감추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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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나오는 다른 사례로는 새로 부임한 교육감이 학생들의 학습 능력 강화를 위해 교사들을 빅데이터로 분석하여 열등한 교사를 쫓아내는 사례가 있다. 이 사례에서는 한 평판이 뛰어난 교사가 등장하는데 그는 이러한 평판에도 불구하고 빅데이터 분석에서 열등한 교사로 분류되어 해고당한다. 이를 납득하지 못한 교사는 담당자에게 판단기준의 공개를 요구하지만, 담당자는 외주화된 그 작업의 알고리즘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실토한다. 교사는 담당자도 이해하지 못하는 분석을 통해 노동자를 해고하는 것이 합당하냐고 따진다. 해석조차 포기한 물신성의 극단적 사례다.

사실 이런 빅데이터 분석에 대한 맹신의 어리석음과 그 위험성은 이미 마이클 케인이 주연한 1967년 스파이 스릴러 “백만 달러짜리 두뇌(Billion Dollar Brain)”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공산주의 소련을 절멸시켜야 한다고 믿는 한 미치광이 미국인 자본가는 판단의 엄정성을 위해 슈퍼컴퓨터로 소련 침공 시나리오를 짠다. 영화에서 그 자본가의 수하 중 하나인 레오 뉴비겐은 입력 데이터를 조작하여 소련 침공이라는 아웃풋이 나오게 하여 침공을 강행하고 주인공 해리 팔머는 이를 저지한다. 이제 우리는 현실에서의 해리 팔머를 만나야 하는데 그게 과연 누구일지 궁금하다.

캐시 오닐?

제러미 리프킨의 『한계비용 제로 사회』 斷想

소위 “미래학자”들의 저서는 별로 읽지 않는 편이다. 취향의 문제이기도 하고 선입견의 문제이기도 한 것 같다. 암튼 최근 피치 못할 사정(!)으로 유명한 제러미 리프킨의 ‘한계비용 제로 사회’라는 책을 일부분 읽었다. 읽었던 서문과 일부 챕터를 요약하자면 기술의 상상을 초월한 발전으로 한계비용이 제로에 가까워지고 이로 인해 “전반적인 최적의 복지”가 이루어지면 다가올 미래는 “협력적 공유사회(collaborative commons)”로 발전할 것이라는 긍정적 세계관에 대한 개론과 각론이랄 수 있다.

그의 이념적 지형은 거칠게 보자면 ‘위험하지 않은 反자본주의자’ 정도 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에 자본주의가 추동하는 기술발전에 따라 “한계비용의 제로化”되는 모순이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반체제적이다. 그는 이러한 주장을 위해 오스카르 랑게와 같은 맑시스트의 분석이나 케인스의 예언을 인용한다. 그런 한편 자본주의라는 패러다임은 협력적 공유사회가 되도 한동안 존속할 것이라고 유보적 입장을 취한다는 점에서 위험한 사고의 소유자는 아니다.

‘패러다임’이라는 개념은 토마스 쿤의 유명한 『과학 혁명의 구조』에서 빌려온 개념이다. 쿤이 패러다임을 처음 쓴 것은 아니지만, 그로 인해 그 단어는 가장 유명해졌다. 패러다임은 “함께 작용하며 통일되고 통합적인 세계관을 확립하는 신념 및 가정 체계로서 설득력이 높고 저항할 수 없는 까닭에 실제 상황 그 자체나 마찬가지로 여겨지는 것”이라 풀이되는 개념이다. 그런 면에서 순응적이고 긍정적인 개념이다. 칼 맑스가 자본주의를 “이데올로기”라 부르며 그것을 일종의 ‘허위의식’이라 부른 것과는 다른 자세다.

이런 점만 봐도 기득권이 제러미 리프킨을 불온시할 이유는 전혀 없다. 오히려 리프킨은 한계비용이 줄어들면서 기존 자본가의 이윤이 줄어들 상황을 염려하면서 로렌스 서머스의 보고서를 인용하며 “일정한 비율로 수익이 증가하는 조건하에 상품이 생산되는 .. 일시적인 독점 권한과 이윤이 민간 사업체에 이러한 혁신에 참여하도록 이끄는 보상이 될 것”이라며 이윤 확보의 로드맵까지 제시하고 있다. 자본주의가 “공유경제”, “협력적 공유사회”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탈정치화될 수 있는 논리를 제공한 셈이다.

내가 보기에 그의 이론의 가장 허술한 점은 “한계비용 제로化”를 협력적 공유사회로 가는 키워드로 여긴다는 점이다. 한계비용은 고정비가 일정한 단기적 생산 상황에서 재화나 서비스가 한 단위 늘어날 때마다 추가되는 비용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생산이 늘어날수록 한계노동생산성이 떨어지며 이에 따라 한계비용은 증가한다. 하지만 디지털 시대가 되며 정보재 등은 한계비용이 0에 가까워지는 상황이 연출되며, 리프킨은 이런 상황에 환호하고 있다. 하지만 장기상황에서는 한계비용 이외에 평균비용이 증가할 것이다.

즉, 현재 정보재와 같은 재화의 한계비용이 제로에 가까운 것은 이미 광범위하게 재정이나 투자로 깔아놓은 각종 물적인 인프라스트럭처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장기적으로 이 고정자본은 갱신되어야 한다. 이미 자본주의 황금기에 깔린 미국 등 서구사회의 인프라는 그 생애주기 막바지에 놓여 있어 대규모 갱신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러한 투입비용을 감안한다면 단순히 소프트웨어 다운로드 속도가 빠른 정황만 가지고 한계비용 제로 사회를 외칠 일인지 모르겠다. 그런 정보재에 대한 불평등한 상황은 차치하고라도 말이다.

또 하나 그의 이론은 “최적의 복지” 로드맵이 눈에 띄지 않는다. 얼론 머스크가 북한의 핵보다 더 위험한 것이 인공지능이라고 했다는데, 그들이 인간의 웬만한 모든 종류의 노동을 빼앗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인류의 재산이 자산과 소득에서 절대 다수 얻어지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의 종말은 소득의 종말을 의미하기에 일부 벤처캐피탈리스트는 ‘기본소득’을 주장한다. 하지만 리프킨은 “소유주와 노동자의 낡은 패러다임이 무너지고 있다”(215p)고 말할 뿐이다. 노동자는 여전히 당장 돈이라는 “낡은 패러다임”이 필요한데?

* 짧은 독서로 거칠게 쓴 글이니 혹시 내가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면 의견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