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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볕, 골목, 고양이

Posted at 2010/03/21 22:06 / Posted in 이런저런/사진찍기



국영투자은행

Posted at 2010/03/21 12:40 / Posted in 경제/민영화
우리가 민간투자사업이라 부르는 사업방식을 영국에서는 PFI(the Private Finance Initiative)라 부른다. 시작된 역사는 1990년대 중반으로 비슷하나, 그 제도나 응용에 있어서는 영국이 더 많은 경험을 축적하고 있다고 여겨지곤 한다. 영국은 특히 NHS, 즉 ‘국가의료서비스(National Health Service)’에 쓰일 병원을 민영화하여 운영하고 있다.
They’ll certainly be cleaning the windows as usual today at the Cumberland Infirmary in Carlisle, the first hospital completed under the Private Finance Initiative (PFI) system, where the Government borrows money from the private sector to build public infrastructure in return for part-privatisation. Opened in June 2000 by Tony Blair and hailed as a flagship, the ₤87 million Infirmary has 442 beds and acres of glass, all paid for privately and leased back to the NHS for 45 years. Three old district hospitals were closed and amalgamated to make way for the new hospital, staff were “rationalised” and patients got used to paying for parking.[The pros and cons of PFI hospitals]
위 내용을 찬찬히 되짚어보자. 국가는 부분적인 민영화에 대한 대가로 공공 인프라를 짓는데 사적부문의 돈을 빌린다. 민간은 병원을 지어 NHS에 45년 동안 임대하고 이에 대한 임대료를 받아 투자재원을 회수한다. 인용문에서 볼 수 있듯이 민간은 수익창출을 위해 예전에는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 주차서비스까지 부대사업으로 하는 것 같다.

PFI, 찬반(贊反)의 논리

정부가 PFI를 추진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공공재원의 부족, 이로 인한 시의적절한 서비스 제공의 부족이다. “공공부문의 자본이 부족할 때 PFI 아니면 파열뿐이다(when there is a limited amount of public-sector capital available, it’s PFI or bust)” 반대자의 논리는 민영화로 인해 민간에게 더 많은 이자를 지불할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이다.

둘 다 일리가 있다. 영국은 재정적자가 GDP의 13%에 육박할 정도로 엄청난 재정압박에 시달리고 있다. 하지만 빅토리아 시대의 낡은 NHS 병원은 시급히 새로 지어야 한다. 결국 미래 세원을 담보로 전당포로 달려간 셈이다. 반면 비판자들은 전당포가 잡은 담보에 비해 지나치게 높은 가격을 매긴다고 주장한다.

또 하나 결정적인 비판자의 논리가 있다. 결국 PFI는 일종의 야바위라는 것인데, 이를 통해 정부는 자신들의 재무제표에서 증가하고 있는 부채를 감추고 있다는 것이다. 즉 사적부문이 지어준 병원에 대한 임대료는 채무가 아닌 계정으로 잡히지만 실질적으로는 채무이기 때문에 눈 가리고 아웅 식의 말장난이라는 것이다.

요컨대 민간투자사업에 대해 공공서비스의 공급이 해마다 늘어나야할 상황에서 재정문제에 시달리는 국가가 시의 적절하게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해당사업방식을 채택하게 되었다는 것이지만, 그것이 다른 시각에서 보자면 결국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할뿐더러 현재 부채현황 상에 잡히지 않게 하는 꼼수까지 동원되고 있다는 것이 현 주소다.

PFI는 무용지물인가?

이렇게 결국은 돈의 문제로 귀결되는 민간투자사업에 대한 찬반논리의 각론에는 민간의 이윤추구논리로 인한 질 낮은 서비스, 잘못된 위험분담으로 인한 형평성 문제, 가격결정시스템의 혼선, 잘못된 수요예측으로 인한 비용발생 등 허다한 장애물이 놓여 있다. 이러한 장애물들은 추진하는 이나 반대하는 이들의 명쾌한 논리의 장애물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결국 어떠한 서비스를 국가가 제공하건 민간이 제공하건 의사결정의 참여자가 많고 그것을 감시하는 이가 많다는 것은 - 찬성자건 반대자건 - ,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덜 쓸모없는 서비스일 가능성이 높고 서비스의 과부족이 자율 조절될 수 있는 가능성도 높이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현재는 시행착오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한편 민간투자사업으로 인해 더 많은 비용을 제공하여야 한다는 비판으로 돌아가 보자. 이것은 사실이다. 민간투자사업은 분명 정부가 직접 제공하는 것보다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얼마 전 민자고속도로 건설에서 폭리를 취했다는 주장도 있었다. 또한 은행에는 더 많은 금리를 지불해야 한다. 자연히 서비스 가격이 올라간다.

전자는 사업시행 초기 단계에서의 가격검증 시스템의 부재에서 비롯된 문제라고 여겨지고, - 관발주 사업보다 해당 시스템의 정비가 덜 되었다는 문제 - 더 많은 금리의 지불은 차주가 엄연히 정부가 아닌 민간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물론 일반 부동산 개발보다는 낮은 리스크가 적용되어 상대적으로(!) 낮은 금리를 적용할 수는 있다.

민간투자사업의 대안, 국영투자은행?

여기서 발생하는 희한한 상황이 하나 있는데 바로 금융위기 때 있었던 국유화 등과 관련한 정부의 모순된 입장이다. PFI의 본류인 영국정부는 2008년 2월 모기지업체 노던록을 국유화했다. 경제자유주의의 천국 미국에서는 세계최대의 보험사 AIG를 국유화하였다. 돈 없어서 민간투자사업 한다는 정부가 금융기관들을 국유화한 것이다.

물론 비상상황에서의 비상조치라고는 하지만 일단 재정위기에 대응하여 공공서비스를 민영화한다는 논리가 조금은 무안해지는 상황이고, 또 하나 재밌는(?) 것은 금융기관이 이처럼 국유화되고 그 기관에서 제공하는 자금이 민간투자사업에 투입될 때에는 굳이 그것이 시장이자율에 상응하게 비쌀 필요가 있는가 하는 주장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즈음에서 제안할 수 있는 개념은 이 같은 개발사업 자금을 시장금리보다 싼 값에 조달할 수 있게끔 해주는 ‘국영투자은행’이다. 다만, 관료들과 정치인의 정치논리에 의해 금융정책이 좌지우지되는 것을 막기 위해 등장한 독립된 중앙은행처럼, 다양한 의사결정 시스템의 한 축으로 개발 사업을 공공적이면서도 ‘독립적으로’ 바라보는 투자은행 말이다.[각주:1]

물론 이 논의 이전에 국가가 직접 공공서비스를 제공해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하면 되지 않느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전의 현실 사회주의 블록이나 국가주도의 자본주의 국가군에서 보아온바 경제논리나 타당성 논리보다 정치논리가 - 정치논리가 반드시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 사업추진 여부를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다.

다양한 의사결정 주체로서의 독립된 한 축

대표적인 것이 현재의 이른바 ‘4대강 살리기’ 사업이다. 그것의 실제 사회편익의 타당성 여부를 떠나서 지극히 제한된 의사결정 단위가 충분한 논의를 거치지 않은 채 추진하고 있다는 상황은 국가의 일방적 사업주도가 가지고 있는 폐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적어도 의사결정이 다른 단위의 논의 및 사업검토가 병행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 한축은 현재 4대강에 대한 대표적인 반대자인 시민사회, 진보세력, 그리고 종교계 등일 것이다. 다만 그들의 반대논리는 환경피해에 대한 우려도 있지만 생명존중 등 약간은 형이상학적인 당위성에 치우쳐 있는 느낌이다. 한편 이를 독립적 국영투자은행이 판단할 경우 앞서의 도덕적 잣대와 함께 경제적 타당성과 지속가능성도 병행 검토할 수 있다.

만약 4대강 사업을 민간투자사업으로 추진하였다고 한다면 - 우선 많은 반대가 있었겠지만 -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 순수 시장논리만으로도 쉽사리 추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해당 사업만 놓고볼 때 경제적 편익을 가늠하기 어렵고[각주:2] 결국 투자자들은 투자를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시장이 반드시 나쁘게 작용하지만은 않는 상황일 수 있다.[각주:3]

그러한 프로세스에 공공에 대한 사회적 편익이 시중은행보다 더 강력한 모티브가 되는 ‘독립적인’ 국영투자은행이 있다면 우리는 국가 단위 투자 사업을 추진함에 있어 좀 더 투명성을 확보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게 되지 않을까? 과거의 기업금융 중심의 은행에서 점점 더 프로젝트 중심의 금융이 활성화될 향후 사회에서 고려해봄직한 대안이다.
  1. 이와 유사한 개념에서 현실에서도 존재하긴 한다. 우선 기업금융 중심으로 국가주도 자본주의의 개발정책을 도왔던 산업은행, 기업은행과 같은 이른바 국책은행이다. 또한 수출을 도모하기 위해 정책금리로 개별사업을 도와주는 수출입은행이 있다. 또한 국민연금이나 우리은행처럼 사회적 소유 또는 국가소유의 금융투자자들이 있다. 우선 앞서의 두 행위자들은 국가로부터 ‘독립적’이라 보기 어렵고 특수목적을 지녔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고 후자들의 투자논리에선 시중 다른 민간투자자와 다를 바 없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본문으로]
  2. 최근 강주변의 관광지 개발권 등을 부여하여 민간자금을 조달할지도 모른다는 보도도 가끔 나오고 있는데 현재와 같이 부동산 시장이 급냉인 상황에서 실현가능성이 매우 낮아보이는 방안이다. [본문으로]
  3. 유사 시장으로 공기업인 수자원공사가 있을 것인데 현재 상황에서는 시장의 논리를 무시한 채 일방적인 정부의 의지에 따라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찰스 미첼(Charles E. Mitchell)

Posted at 2010/03/21 07:52 / Posted in 경제/경제사
연준을 그렇게 멋지게 한방 먹인 찰스 미첼은 호황을 계기로, 은행의 전통적인 이미지 즉 사람들의 재산과 전통적인 가치를 지켜주는 파수꾼이라는 이미지를 파괴하는 데 큰 공헌을 한 사람이었다. [중략] 미국에서 가장 큰 상업은행을 경영하던 사람이었지만, 그가 보기에 은행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대출이나 예금 업무가 아니라, 주식을 포함한 유가증권을 매매하는 일이었다. 은행가라면 채권은 몰라도 주식은 아무리 좋은 회사의 것이라도 조심스럽게 봐야 하는 게 원칙이던 시절, 이런 그의 발상 자체부터가 전통과는 거리가 멀었다. 미첼은 이런 이단적인 행동에서 한 걸음 내지 두 걸음 더 나아가, 흔히들 하듯 가만히 앉아 손님이 유가증권에 대해 문의하러 오기를 기다린 게 아니라, 상품을 팔러 다니기까지 했다. [중략] 물론 은행은 법적으로 유가증권 거래를 할 수 없게 되어 있었으나, 미첼의 은행은 당시 다른 은행들과 마찬가지로 유가증권 전문 계열회사(security affiliate)를 세우는 방식으로 쉽게 이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며, 때로는 그 직원들을 전부 은행직원으로 메우기도 했고, 비은행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마음대로 유가증권 시장에 뛰어들어 장사를 했다. 따라서 누군가가 이런 유가증권 계열회사를 ‘법률상의 웃음거리’라고 비웃자, 많은 사람들이 이에 동감했다. [중략] 미첼은 자신의 영업방식에 대해 너무도 솔직했으며, 유가증권 거래를 제조업의 다른 상품 거래와 하나도 다를 바가 없는 것처럼 얘기하곤 했다.[골콘다, 존 브룩스 지음, 이동진 옮김, 그린비, 2001년, pp146~147]
현재의 시티은행의 전신인 내셔널시티(National City) 은행의 행장이었던 찰스 미첼(Charles Mitchell)은 인용한바와 같이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은행의 역할에서 벗어나 오늘날의 투자은행과 유사한 영업행위를 통해 막대한 이윤을 창출했다. 그리고 잘 알다시피 이러한 은행의 무분별한 영업행위, 그리고 다양한 다른 원인들이 결합되어 1929년 대공황이 발발하였다. 이후 한동안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은 글래스-스티걸 법 등 관련제도를 통하여 그 영업범위가 엄격히 규제되었다.

찰스 미첼의 유가증권 영업행위가 옳은 것이냐의 여부를 떠나서 그가 시대를 앞서간 혁신가 중 하나라는 것은 인정하여야 할 것 같다. 그는 증권 거래를 다른 상품 거래와 마찬가지로 보고 스스로를 그 상품의 거래자로 자리매김하였다는 점에서 가만히 앉아 고객이 찾아오기를 기다리며, 고객의 돈을 맡아두는 것에 만족하던 은행가들과는 많이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그는 은행가(banker)이기도 하지만 채권 영업인(bond salesman)이기도 하였고, 스스로도 그러한 역할에 솔직했던 것 같다.


<‘삼성을 생각한다’를 읽고>를 쓰고

Posted at 2010/03/15 18:14 / Posted in 문화/책
며칠 전 블로그에 <‘삼성을 생각한다’를 읽고>라는 글을 올린 후 자칭 ‘댓글의 무덤’ 블로그에 적지 않은 댓글이 달리는 이변이 발생했다. 내 글의 냉소에 재밌어 하시는 분이 많았고, 일부 불편하시는 듯한 분도 계셨고, 또 극히 일부 ‘반어법’ 자체를 이해 못하시는 분도 계셨다. 아무렴 글이야 쓰는 사람의 손을 떠나가면 감상은 읽는 자의 몫이니 이를 탓할 일은 아닌 듯싶다.

여하튼 냉소적인 톤에 조금 불편하셨을 분도 있을 것 같아서 노파심에 한마디 변명하자면, 사실 개인적으로 이 책의 독후감을 쓰려고 생각한 순간부터 반어법이 아니라면 독후감을 쓸 수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그렇게 썼다. 너무 악취가 심한 이 암담한 현실에 무력감이 어깨를 심하게 짓눌러, 냉소가 아니라면 탈출구가 따로 없었기 때문이다.

여담이지만 사실 희극이라는 장르는 부조리한 현실을 어쩌지 못해 그것을 웃음으로라도 승화시키고자 발달한 장르로 알고 있다. 그래서 가진 자들과 모순된 현실에 대한 풍자가 희극의 최고봉으로 여겨져 왔다. 예를 들어 찰리 채플린의 ‘독재자’나 조나산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는 풍자를 통해 그 어떤 직설적인 비판보다 더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각설하고 또한 노파심에서 한마디 더하자면 나의 글은 당연히 삼성이라는 기업 자체에 대한 부정이 아니다. 또한 삼성의 노동자에 대한 부정이 아니다. 삼성일가의 노력(무시하지 못한다), 삼성 노동자의 희생, 사회적 뒷받침 등 모든 노력들의 총합체인 삼성이라는 기업은 우리나라를 먹여 살리는 고마운 경제주체이다. 이것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다만 자본주의 독점기업 상당수가 그러하듯이 - 다만 유독 삼성이 두드러지게도 - 자본주의 경쟁사회에서 삼성은 - 보다 정확하게는 삼성일가와 그 하수인들이 - 권력의 매수 등 불법적/탈법적 수단을 통해 사익(私益)을 추구하고자 하는 의지를 강하게 드러냈고 실제로 실행에 옮겼다는 - 아니 옮겼다고 추정되는 -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싶다.

책에서도 김용철 씨가 주장하고 있듯이 그러한 각성은 반기업적/반자본주의적 행위라기보다는 오히려 가장 친기업적이고 친자본주의적 행위랄 수도 있다.(물론 자본주의 실재와 그 이상향이 일치하지 못한다는 반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 입장에서 비판할 수도 있고) 즉 역설적으로 주주자본주의의 이해에 가장 반하고 있는 이는 책에 따르면 삼성일가일 것이다.

그들의 행동은 자본주의적이라기보다는 봉건적이다. 소수지분을 가지고 순환출자를 통해 그룹에 대한 지배구도를 확립한 후 편법적인 장난질을 통해 엄청난 부를 친자식에게 증여하는 행위는 자본주의 경영학과 아무 관련이 없고 삼성이 지향한다고 추정되는 기업철학과 아무 관련이 없다. 그런 행위에 대해 사법부는 미사여구를 동원해 면죄부를 주었다고 김용철 씨는 주장한다.

하지만 사법부가 정당화시킨 것은 어쩌면 금권주의, 유전무죄/무전유죄라는 삐뚤어진 사회인식, 국내기업에 대한 외국인들의 부정적 시각, 그리고 경영능력이 검증되지 않은 봉건적 후계구도 등 부정적 유산뿐이다. 이로 인해 가까운 미래에 우리는 골드만 CEO의 다음 직책이 재무부 장관인 미국처럼 삼성임원이 관료로 직행하는 ‘선진국형 정경유착’의 시대에 살게 될지도 모른다.

이윤의 추구도 정도(正道)를 걸어야 한다는 것이 애초 불가능한 일을 꿈꾸는 백면서생의 생각 일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자본주의 초기의 그 악랄한 자본가라 욕먹은 이들도 나름의 윤리는 있었다. 대표적인 독점자본가였던 록펠러는 극히 청교도적인 사고방식으로 기업을 경영하였고 2세는 전문경영인에게 회사를 맡기고 경영일선을 맡지 않았다.

적어도 그때는 그런 낭만이라도 있었다.

사전 통고도 없고, 예비 기간도 없는 이런 해고 절차는 130년 이상된 오랜, 미국 사회의 관행이고  주에 따라 조금씩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법적으로도 인정되는 관습이라는 것이 놀랍습니다. "자유의지에 따른 고용"(Employment at Will) 정도로 해석될 수 있는 이 원칙은, 고용계약서에 특별히 규정하고 있지 않다면 고용주와 피고용자 양측 모두가 어떤 이유에서나, 심지어는 아무런 이유 없이도 고용관계를 일방적으로 끝낼 수 있는 권리를 갖는 것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얼핏보면 고용주와 피고용자에게 동등한 권리를 보장하는, 매우 합리적인 원칙처럼 보이지만 현실적으로는 고용주에게 자신의 의지대로 아무때나 고용관계를 중단할 수 있는 권한을 줘서, 최고 수준의 고용 유연성을 보장하는 아주 "비지니스 후렌들리"한 정책임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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